조선판 GIS, '산경표'를 만난다

글·사진 박경이 국립산악박물관 관장 2022. 1. 1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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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필사본 공개
속초 국립산악박물관의 ‘백두대간에 살어리랏다’ 전시장 입구.
속초 국립산악박물관에서 백두대간 기획전시회를 열었다. ‘백두대간’이라 하면 종주 산행을 떠올리지만, 이번 전시회는 대간을 있게 한 역사적인 뿌리와 근간을 심도 깊게 파헤치고 있다. 백두대간의 근원인 <산경표山經表>를 기반으로, 일제강점기 이후의 ‘태백산맥 체계’와 ‘백두대간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특히 <산경표>가 단순히 산의 족보를 넘어서 구체적인 위치 정보를 담고 있는 조선판 지리정보시스템GIS이라는 점을 새롭게 알리고 있다. 또한 지난 30년간 이룩해 온 백두대간 관련 단체들의 업적을 정리하고 앞으로 30년 백두대간의 미래적 가치를 가늠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번 전시는 국립산악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조선시대 지리서 <산경표>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산경표>는 조선판 GIS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역의 진산을 중심으로 1,600여 자연 지명과 300여 고을을 8개 방위와 1리 단위의 거리로 표시해 18세기 조선의 인문·지리 정보를 집대성한 지리서다. 전국적인 산줄기 체계 위치 정보를 족보 형식으로 나타낸 <산경표>와 같은 지리서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의 것이라 특별하고 소중한 유산이다.
국립산악박물관은 2021년 초 백두대간을 주제로 강연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중 수장고에 있던 <산경표>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희귀본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문가의 고증과 국역 해제를 통해 19세기 초기에 필사된 희귀본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한국 고문서 데이터베이스인 한국고전적종합목록에 18번째 판본으로 등재했다. 이어 조선광문회 인쇄본 <산경표> 2종도 등재했다.
조선시대 18세기 말 무렵에 완성된 백두대간 개념은 산과 강, 우리 국토를 가장 독창적으로 표현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지리인식 체계이다.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더불어 잊혀졌던 백두대간 체계는 1990년 무렵부터 되살아났으며, 이번 전시 기간 중 ‘백두대간 부활사’라는 테마로 소개되고 있다.
이번 기획전시는 <산경표> 발굴의 대미를 장식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산악박물관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나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의미도 크다. 박물관에서는 소장 유물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연구와 더불어 이를 더 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공개하기 위한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전시는 1부와 2부로 주제에 따라 공간이 나뉘어 있다. 1부의 주제는 ‘백두대간과 산경표’이다. <산경표>를 비롯해 <택리지> 같은 지리서와 조선시대 지도, 그리고 백두대간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전시장 초입에는 기획 의도와 함께 조선 전도인 <청구여도첩靑邱輿圖帖>을 배치해 관람객들이 포토존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청구여도첩>은 원본을 확대 복사해 백두대간 산줄기가 잘 보이도록 디지털 작업을 했다.
옆 공간으로 한 걸음 이동하면 이번 기획전의 주인공인 박물관 소장 <산경표> 필사본 1종과 조선광문회 인쇄본 2종을 볼 수 있다. <산경표>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규장각, 장서각, 미국 하버드 옌칭도서관, 일본동양문고 등 국내외 기관에서 필사본 17종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산악박물관이 발굴한 <산경표>는 이 필사본 17종에 이어서 18번째 판본으로 등록되었다.
백두대간과 주요 명산이 그려진 <청구여도첩>, <팔도명산지도> 등에서는 한자 지명에서 자신의 고향이나 현 주소지에 해당하는 고을을 찾고자 집중하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두대간 부활사’라는 코너에서는 잊혀진 이름이었던 백두대간이 발견되고 세상으로 다시 나온 과정을 알 수 있게 구성했다.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소속 대학산악부원들이 1980년에 인쇄본 <산경표> 발견자 고故 이우형 선생과 협력해 최초로 백두대간 종주를 한 사실을 담았다. 산림청의 백두대간 관련 정책과 법령 등이 제정되는 과정, 백두대간 관련 연구 보고서와 단행본 발간 등의 역사를 연표로 정리했다. 최근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의 영상 공모전으로 만들어진 청소년 백두대간 생태탐방 영상도 상영하고 있다.
전시회는 지난 11월 25일 개막식을 열었으며 2022년 3월 27일까지 열린다.
<산경표> 원본을 찾습니다
2부에서는 ‘글과 그림으로 보는 백두대간’을 주제로 하고 있다. 설악산 시인 이성선의 대표작 ‘큰 나무’ 중 ‘큰 산이 큰 영혼을 기른다’는 시구가 있다. 국립산악박물관은 백두대간의 큰 산 금강산과 설악산 가까이, 속초의 큰 나무처럼 자리 잡고 있기에 설악산과 금강산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정했다.
2부에 전시된 작품들은 그동안 국립산악박물관이 전문산악박물관으로서 일관되게 수집해 온 결실로서 백두대간을 대표하는 큰 산인 금강산과 설악산을 묘사한 회화작품, 문학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산을 찾아 심신을 도야하며 유학의 이치를 터득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고자 했다. 금강산이나 설악산 같은 큰 산을 다녀가는 것이 버킷리스트였고 유산遊山 중에는 시를 지었으며, 산에 다녀와서는 산수유기山水遊記를 남겼다. 화가들은 화폭에 산을 담아 세상에 알리고, 실학자들은 지리서를 썼으며 백두대간 줄기와 진산들을 지도에 나타냈다.
조선 후기 문신 권구(1769~1847)의 <고암유고顧庵遺稿>, 조선 중기 학자 이우(1486~1521)의 시문집인 <송재시집松齋詩集>등 문학작품에서는 산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글귀를 선별해 한글로 번역해 놓아 사대부 문인들의 글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금강산 병풍은 해당 그림을 영상으로 제작해 애니메이션 효과를 주어 움직이는 그림처럼 재미를 주고자 했으며, 전시장 안쪽에는 8폭 금강산도 병풍과 10폭 해금강산도 병풍 실물을 전시했다.
국립산악박물관 기획전시 ‘백두대간에 살어리랏다’는 3월 말까지 이어질 예정이며, 겨울철 설악의 설경과 조선시대의 설악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등산 동호인들과 월간<山>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이번 산경표 관련 연구와 세미나, 전시는 공개된 자료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전시를 계기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산경표 판본들이 세상에 나오기를 기대하며, 원본이 발굴되지 않았기에 원본의 등장도 희망해 본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를 계기로 서양의 등산 역사보다 더 오래되고 철학적인 깊이와 폭에서 다른 차원의 독특한 가치를 지닌 한국의 백두대간과 유산遊山 문화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무형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를 날을 기대해 본다.
<산경표> 필사본
<산경표> 필사본 조선
국립산악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산경표>는 현존하는 필사본 중 가장 작은 크기이다. 눈에 띄는 것은 기존 <산경표>가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산줄기를 분류한 것과 달리, 1대간 2정간 12정맥의 산줄기로 정리한 것. 1800년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본이 편찬된 시기(1770년 전후)에서 50여 년 이내의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원본의 존재와 발굴 가능성을 보여 준다.
<산경표> 인쇄본
<산경표> 인쇄본 일제강점기
육당 최남선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 납 활자로 간행한 <산경표>이다. 조선광문회는 우리 고전의 보존과 보급을 통한 민족문화의 선양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택리지擇里志> 필사본
<택리지擇里志> 필사본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이 저술한 조선 최고의 인문 지리서이다. 풍수지리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자연 현상과 인간 생활의 관계를 찾으려 한 점에서 최초의 인문 지리서로 평가받고 있다. 국립산악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택리지>는 장명·편명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전체 내용을 필사한 것이 특징이다.
<청구여도첩靑邱輿圖帖> 조선전도
<청구여도첩靑邱輿圖帖> 조선전도
‘청구靑邱’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옛말이다. 이 지도첩은 조선전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순으로 총 10개의 지도가 실려 있다. 특히, 전도를 살펴보면 백두대간의 1대간 1정간 13정맥과 압록강과 두만강을 비롯한 10대강의 물줄기가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
<팔도명산지도八道名山地圖> 강원도
<팔도명산지도八道名山地圖> 강원도
명산을 중심으로 그린 회화식 팔도지도이다. 산줄기가 이어져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백두대간을 이루는 여러 산과 고개의 명칭들이 기록되어 있고, 분수계가 표현된 것을 보아 백두대간이라는 지리체계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해금강산도海金剛山圖> 근대
<해금강산도海金剛山圖> 근대
외금강의 명소인 해금강 총석정 일대를 수묵담채로 그린 그림으로 전면에 그려진 해금강과 총석정 뒤로 금강산의 모습을 도열해 엷게 표현했다. 화면 오른쪽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폭포를 보는 두 사람이 있고, 중앙에는 지팡이를 짚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한 사람이 보인다. 왼쪽에는 두 사람을 태운 뱃사공의 배가 총석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총석정에 앉은 한 사람이 유유히 바라보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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