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4년 전 평창은 신기루였나
지난해 연말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기자회견에서 “베이징에서 쇼트트랙 금 1~2개, 총 4개 정도 메달을 따 종합 순위는 15~20위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총 17개(금 5, 은 8, 동 4개), 역대 동계올림픽 사상 최다 메달을 목에 건 대한민국 체육계 수장이 정확히 4년 후, 국민들의 기대 수준치를 혹한 수은주처럼 밑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진짜 메달 전망치는 뒷주머니 속에 꼭꼭 감춰놓는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인색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 보니 엄살 같지가 않다. 세계 최강이라던 쇼트트랙은 부상과 내분으로 전력이 크게 약해졌고, 이상화가 떠난 빙판에는 뚜렷한 스타가 눈에 띄지 않는다. ‘영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여자 컬링 대표팀 팀 킴도 4년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최근에야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스켈레톤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건 윤성빈은 올해 성적이 예년만 못하고, 유럽파 특별 귀화 선수들이 거의 본국으로 돌아간 설상 종목엔 평창 스노보드에서 사상 첫 메달을 딴 ‘배추보이’ 이상호가 유일한 희망이다.
올림픽뿐 아니라 세계선수권 월드챔피언십 빙판에도 자력으로 섰던 남자 아이스하키팀은 이번에는 아예 출전도 못 한다. 그만큼 장벽이 높은데도 대통령까지 나서 약속했던 상무 팀 창단은 4년째 답보 상태고, 협회 회장까지 공석(空席)이라 추진 동력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이기흥 회장이 목표를 낮게 잡았다는 말에 “우리가 그것밖에 못 딴다고요? 두고 보세요”라고 반문했던 쇼트트랙 대표들의 생생한 눈빛을 떠올리면서 ‘응원 수은주’를 최대한 끌어올릴 생각이다.
평창올림픽은 올림픽 개최 효과로 남는 유·무형의 유산과 영향 등을 뜻하는 올림픽 레거시(legacy) 측면에서 더욱 안타깝다. 체육인 출신 임오경 의원이 지난해 국정감사 때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강릉하키센터, 스피드스케이팅장, 슬라이딩센터 등 시설 7개의 3년간 운영 적자가 총 135억원에 달했다. 수익률도 평균 -78%에 이른다. 무려 1142억원이 소요된 슬라이딩센터는 현재 국가대표 훈련장으로 쓰고 있지만, 국제 대회를 개최한 게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이명박 정부 때 야심 차게 유치했던 평창올림픽이 ‘비용 절감을 위한 철거’와 ‘존치’에서 우왕좌왕한 박근혜 정부 때 기형적인 모습으로 바뀌었고, 그다음 문재인 정부 때는 남북관계 개선 도구로만 활용된 결과다. 본부석 건물과 성화대를 제외하곤 모두 철거된 평창 개·폐회식장에 지난해 개최 3주년을 기념해 올림픽 기념관이 들어서고, 2019년 설립된 평창기념재단이 최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올림픽 레거시의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는 대회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이다. 전폭적인 투자와 지원 속에 한국 스포츠가 하계 올림픽 최강국 중 하나로 발돋움했을 뿐 아니라 당시 대회를 치른 잠실종합운동장과 올림픽공원이 지금도 끊임없이 각종 스포츠와 문화 이벤트를 열면서 시민의 여가·문화 공간 역할을 해내고 있다.
반면 지난해 연말 올림픽 이후 처음 찾은 강릉에선 드문드문 보이는 수호랑과 반다비(평창 마스코트였다) 조형물이 없었다면 ‘과연 이곳이 올림픽을 치렀던 곳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주말 교통 체증에도 자전거를 맘 편하게 타고 싶으면 주차장에 차 한 대도 없는 아이스아레나를 찾으라’는 한 네티즌의 소개 글엔 쓴 웃음만 나온다. 우리가 4년 전 감동을 느꼈던 평창은 척박한 동계 스포츠에 희망의 물 한 모금을 선사하는 오아시스가 아니라 환영만 남긴 채 사라지는 신기루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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