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로 돌아온 '1억 배우'.. 가장 매력적인 惡人 뿜어낸다

박성준 2022. 1. 17.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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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무대 귀환.. '리차드 3세' 황정민
열등감 속 권력 향한 뒤틀린 욕망
셰익스피어 정수 살려 100분 무대
정확한 발성으로 시적인 대사 소화
음험함 드러내는 '몸 연기'도 일품
국립창극단 출신 정은혜 구음 주목
전투 장면 무대 확대.. 입체감 살려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욕망의 폭주’라는 극적인 스토리를 지닌 희대의 악당 리차드 3세로 열연 중인 배우 황정민. 선천적으로 기형인 신체 결함에도 불구하고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뛰어난 언변과 권모술수, 유머감각, 탁월한 리더십으로 경쟁구도의 친족들과 가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권력의 중심에 서는 악당을 연기하는 그는 기자회견에서 “‘리차드3세’ 이야기 자체가 주는 매력이 어마어마하다”며 “고전의 클래식함, 위대함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뉴시스, 샘컴퍼니 제공
연극 ‘리차드 3세’ 막을 여는 건 랭카스터 가문의 생존자 마가렛 왕비다. “그대들은 아는가”라며 “비극은 등 굽은 저자로부터 시작되리라”고 앞으로 펼쳐질 사건을 예고한다. 장미전쟁에서 승리한 요크 가문의 환호성을 배경으로 바로 옆에서 어슬렁거리던 글로스터 공작, 훗날 리차드 3세는 “불만의 겨울은 가고 태양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이 왔구나”라며 비로소 유명한 독백을 시작한다. 모두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찬란한 순간, 혼자서 결핍과 열등감에 치를 떠는 리차드 3세는 “난 뒤틀린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듯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세상에 내가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지”라며 세상 모두를 속이고 악행으로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선포한다.

이후 숨 가쁘게 펼쳐지는 리차드 3세의 왕좌를 향한 모략과 책동은 엄청난 흡입력으로 관객을 집중시킨다. 이간질로 큰형이 작은형을 죽이도록 하고, 그 충격으로 큰형이 죽자 조카인 어린 왕자들을 다시 죽이고 결국은 왕이 된다. 그리고 타인을 지배하려는 정복욕과 추악한 외모를 보상받으려는 비뚤어진 심성으로 다시 자신이 시아버지와 남편을 죽인 귀부인 앤을 유혹해 왕비로 삼는다. 뜻대로 앤을 갖게 된 순간엔 다시 “오래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라고 내뱉는다. ‘이런 악당이 세상에 또 있을까’란 탄식이 절로 나온다.

영화로 그를 본 관객이 이미 수년 전 1억명을 돌파한 국민배우 황정민.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배역을 맡으며 때로는 악당으로, 때로는 순애보 주인공으로 스펙트럼 넓은 연기를 보여줬다. 이번 무대 역시 역대급 악역을 마치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소화해낸다. 영화 ‘달콤한 인생(2005)’에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백사장’ 만큼이나 순도 100%짜리 악을 무대 위에서 발산한다. “무대에서 가장 자유를 느낀다”며 영화보다 연극이 더 좋다고 말한 배우답게 셰익스피어 작품 특유의 때로는 장황하면서도 시적이며 감칠맛 나는 대사를 완벽한 발성으로 소화해낸다.
그는 배우들에게 정확한 발성을 강조하며 혹독하게 훈련한다는 김민기의 극단 학전 출신이다. 웅크리며 적을 방심하게 만들다가 기회가 오면 마치 악마가 어둠 속에서 기지개를 켜듯 굽은 등을 활짝 펴고 자신의 음험함을 드러내는,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마치 복서처럼 사선으로 움직이며 사냥하듯 목표에 다가서는 몸 연기 또한 일품이다. 황정민은 최근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사가 시적인 표현들이 워낙 많다. 듣기에는 쉽지만 하기에는 진짜 어려운 대사들이다. 배우들이 공부하기에 정말 좋은 작품이고, 연극에서만 할 수 있는 특징이 이 작품에 다 들어가 있다. 개인적으로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애초 ‘리차드 3세’는 2008년 연극 ‘웃음의 대학’ 이후 10년 만에 그가 무대 복귀작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2018년 초연 후 2019년에는 ‘오이디푸스’를 선보이고 다시 올해 ‘리차드 3세’로 돌아와서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기록될 법한 연기를 보여준다. 황정민은 “고전극을 보고 자라면서 동경을 해왔다. 점차 고전극이 설 자리를 잃었는데, 일반 대중 관객분들한테는 물론 이 일을 시작하려는 학생들한테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역대 ‘리차드 3세’의 계보는 1955년 로런스 올리비에 이후 알 파치노, 이언 매켈런,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으로 이어진다. 모두 ‘매력적인 악당’이란 난제에 도전한 당대 명배우들이다. 우리나라에선 1995년 국립극단이 국내 초연했는데, 지금의 ‘깐부 할아버지’ 오영수가 주연으로 활약한 바 있다.
극을 여닫고 주요한 대목마다 등장해서 인간이 지닌 숙명의 잔인함을 경고하는 마가렛 왕비로는 국립창극단 출신 정은혜가 소름 돋는 연기를 보여준다. 창극 ‘메디아’, ‘레이디 맥베스’에서 진가를 보여줬던 정은혜가 특유의 구음으로 모두에게 묻는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는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이를 두고 정은혜는 기자회견에서 “사실 관객에게 제가 드리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원망을 쏟아붓는 그 소년(리차드 3세)이 자기가 그렇게 뒤틀리고 싶었겠습니까. 그렇게 태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사랑받지 못했던 그 한 소년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사랑이 없었죠.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건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사건들을 외면하거나 그런 결핍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조금 더 지켜보고 사랑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막힘없이 대단원까지 이어지는 원활한 전개는 서재형 연출·한아름 작가 콤비의 힘이다. 역동적인 연출과 빠른 장면전환, 영상 투사 등을 활용한 감각적 이미지 구현은 클래식의 모범적인 현대화다. 특히 셰익스피어 초기작으로서 불친절할 정도로 띄엄띄엄한 원작을 작가는 100분 분량으로 압축하면서 원작 맛은 고스란히 살려냈다. 서재형은 “제 눈에는 셰익스피어 작품 서른네 편 중에서 이렇게 정리가 안 된 작품이 없다.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고 난해했는데 잘 정리됐다고 믿는다”고 각색 과정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영국 왕조의 흑역사로만 기억됐을 대악당에게 셰익스피어가 불멸의 매력을 쏟아붓는 건 마지막 전투를 앞둔 밤이다. 야습하듯 자신을 찾아와 저주를 퍼붓는 망령들에 맞서 ‘리차드 3세’가 빙의한 황정민은 그가 지닌 모든 힘을 모아 외친다. “아, 나약한 양심이여. 네가 어떻게 이렇게 감히 나를 괴롭힐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런데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하, 시끄러운 망자들의 말 따위에 겁먹지 말자꾸나. 양심이란 한낱 겁쟁이들이 강한 자를 겁주기 위해 사용하는 말에 불과하다. 내 강력한 군대가 바로 양심이고 칼이 곧 법이다. 나는 진군한다. 나는 진군해야만 한다. 나는 진군한다.”
욕망과 열등감으로 삐뚤어진 심성에도 남아있던 양심의 가책을 힘겹게 물리친 ‘리차드 3세’는 전장으로 나선다. 그를 기다리는 마지막 전투 장면에선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가 깊은 뒤편까지 확대되며 전장의 입체감을 살려준다. 신체적 약점이 오히려 기마전에선 낮은 중심으로 유리해서 뛰어난 기사였다는 ‘리차드 3세’는 “말을 다오. 내게 말을 다오”라며 불굴의 투지를 끝까지 불태운다. “네가 지은 죄를 아느냐”는 저주에는 “내가 지은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고 싶다”고 맞선다. 기자회견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묻자 황정민은 “악행은 내가 저지르고 통탄할 책임을 남들에게 미루기 위한 손쉬운 방법”을 꼽았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월 13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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