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워진 바다, 숨 막히는 멸치

이정호 기자 2022. 1. 16.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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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멸치들이 천적을 방어하기 위해 떼지어 이동하고 있다. 멸치는 해양 동물 50여종의 먹이가 되는 등 생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 바다 수온 상승으로 멸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해양 생태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제공
은빛 무리의 헤엄, 어쩌면 이 모습 못 보게 될지도

푸른 바닷속에서 거대한 ‘은빛 덩어리’가 말랑말랑한 고무공처럼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꿔가며 꿈틀댄다. 은빛 덩어리 주변에는 상어 수십 마리가 지느러미를 흔들며 배회한다. 팽팽한 긴장을 깨며 갑자기 상어 몇 마리가 입을 한껏 벌리고 은빛 덩어리로 빠르게 돌진한다. 덩어리는 신속히 모양을 바꿔가며 최대한 상어와 거리를 띄우려 애쓴다. 동영상 검색 사이트에서 ‘anchovy and shark’(멸치와 상어)을 입력하면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은빛 덩어리는 멸치 수백만 마리가 포식자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군집이다.

바다 최고 포식자라는 상어가 멸치 떼를 공격하는 것이 졸렬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상어는 물론 갈매기, 다랑어, 고래, 거북, 바다표범 등 해양 동물 대부분이 멸치를 자신의 식탁에 올린다. 멸치는 손쉽게 잡아먹을 수 있는 소형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멸치의 수난’은 수많은 포식 활동을 감당할 만큼 개체 수가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멸치는 ‘바닷속 화수분’이었다.

■ ‘멸치 황금어장’ 몰락 징후

과학계 ‘멸치 소멸’ 우울한 전망
페루 근해 어획량, 수년 사이 ‘뚝’
50년 전의 절반 이하로 줄기도

그런데 앞으로는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독일 키엘대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 공동 연구진은 미래 바다에선 멸치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을 내놨다. 연구 결과는 지난 7일 발간된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최신호에 게재됐다.

연구진이 이번 분석에 나선 건 ‘훔볼트 해류’가 흐르는 페루 근해의 최근 상황 때문이었다. 훔볼트 해류는 남미 연안을 따라 적도 방향으로 흐르는데, 영양분이 많다. 물고기들을 많이 끌어들인다는 뜻이다. 세계 어획량의 8%, 특히 멸치 어획량의 10%가 이곳에서 나온다. 그런데 최근 동향이 심상치가 않다. 1971년 페루 근해의 연간 멸치 어획량은 1300만t에 이르렀다. 최근 수년 사이 어획량은 400~800만t이다. 적게는 50년 전의 3분의 1도 못 잡고 있는 것이다.

■ ‘산소 부족’으로 생태계 흔들

12만5000년 전 수온 2도 높던 땐
초소형 물고기가 멸치 위치 차지
높아진 수온에 ‘산소 부족’ 영향
덩치 큰 물고기, 생존에 어려움

과학계에선 멸치 어획량이 급감한 큰 원인이 기후변화로 수온이 올라서라고 본다. 기후변화에는 속도가 붙고 있다. 그럼 멸치는 더 줄어들까. 연구진은 답을 찾기 위해 훔볼트 해류가 흐르던 12만5000년 전 페루 근해의 퇴적물을 퍼냈다. 그리고 퇴적물에 섞인 생물들의 등뼈를 분석해 당시 ‘더운 바다’에서 헤엄쳤던 물고기 종류를 가려냈다.

미래를 예측하겠다며 과거의 퇴적물을 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12만5000년 전에는 지구 수온이 2도 높았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뒤 바다가 처할 환경과 같다. 과거의 기록에서 미래를 가늠한 것이다.

분석 결과는 우울했다. 12만5000년 전 바다에서 멸치의 자리는 사실상 없었다. 대신 멸치와 비교하면 덩치가 절반에 불과한 초소형 물고기가 현재 멸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산소’였다. 수온이 높을수록 물에 녹는 산소의 양은 줄어든다. 작은 물고기들은 덩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가미의 면적이 넓다. 산소가 적어도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덩치 큰 물고기는 못 산다는 뜻이다. 멸치가 지금 바다에 녹아 있는 산소의 기준으로는 작은 물고기이지만, 앞으로 등장할 ‘저산소 바다’에서는 비교적 큰 물고기에 속할 거라는 뜻이다. 2도 따뜻한 바다에서 멸치는 사라지는 것이다.

■ 궤멸 막으려면 어획 제한해야

멸치 사라지면 생태계 연쇄 재앙
CO2 배출 억제·어획 제한해야

멸치의 부재는 재앙을 부른다. 연구진은 멸치보다 작은 물고기는 지방산 등 영양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멸치를 잡아먹던 수많은 해양 동물들의 영양 상태가 연쇄적으로 나빠지게 된다.

인간의 영역인 양식업도 타격을 받는다. 멸치는 양식 물고기의 주요 먹이다. 연어처럼 주로 양식으로 생산하는 어종은 기르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멸치보다 작은 생선은 바다에서 잡기도 어렵다. 어민들은 그물코를 더 작게 바꾸고, 더 오래 항해해야 한다.

이런 재앙의 근본적인 방지책은 역시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다. 당장은 비상 대책을 써야 한다. 연구진은 사이언스를 통해 “기후변화로 개체 수가 줄어든다면 당국이 허용하는 멸치 어획량을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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