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건축가의 공공탐색] 시간이 머무는 장소, 황룡사 터

한겨레 2022. 1. 1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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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황룡사 터. 임형남 그림

노은주·임형남 | 가온건축 공동대표

폐사지란 예전에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은 곳을 말한다. 대표적인 폐사지는 경주에 있는 황룡사 터와 양주 회암사 터, 여주 고달사 터, 강릉 굴산사 터 등이 있다. 그렇게 유명한 곳 말고도 전국에는 수천개의 폐사지가 남아 있다.

폐사지를 물리적으로 정의하자면 만물의 생성과 지속 원리인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작용’에서 물질은 사라지고 에너지만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간혹 불완전하게나마 물질(석탑이나 불상, 석등 같은 유물)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물질이 대부분 사라진 빈 곳을 채우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건축이 망한 곳에서 건축의 완성을 볼 수 있는 역설적인 장소이다.

그 말은 폐사지의 건축은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방문한 사람이 스스로 빈 곳을 채우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인식능력과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하며 주추만 남은 자리에 기둥을 복원하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려 완성한다. 건축을 감상하는 대신 창조적인 수용으로 스스로 건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정말로 좋은 것은 그곳에 가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고, 간혹 오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소리가 완전히 소거된 채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고 궁극적으로는 무한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폐사지가 가장 많은 도시는 아마 경주일 텐데, 신라 천년의 도읍이었고 불교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 시대의 경주를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절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이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다)이라고 표현했다. 경주의 폐사지는 너무나 유명한 감은사 터부터 시작해서 사천왕사 터, 망덕사 터, 보문사 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절터는 황룡사이다. 그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고 늘 그리워하는 곳이다. 경주의 한복판에 펼쳐진 너른 터는, 낭산을 옆구리에 끼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선덕여왕이 그곳에 구층 목탑을 만들었고 엄청나게 커다란 불상을 모셨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상상하기란 지금은 쉽지 않다.

푸른 들판 위에 둔덕이 몇개 있고 둔덕 위에는 건강한 피부처럼 밝고 불그스레한 빛이 감도는 커다란 돌이 몇개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작은 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진을 치고 있는데 부처님이 서 있었던 자리이고 기둥의 자리이다. 그 중심으로 들어가면 경주의 중심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특히 해가 지며 하늘이 주황색을 띨 무렵 그곳에 서 있노라면, 경주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 아니 우주의 중심에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잦아들며 시간이 문득 멈춰서서 같이 석양을 보는 듯하고, 신라의 천년을 지속하게 만든 기운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으나 그래서 오히려 가득 찬 곳. 황룡사는 그런 곳이다.

사방으로 빙 돌며 바라보자면, 남쪽으로 경주 남산이 보이고 미탄사 절터에 홀로 남은 탑이 보이고 진평왕릉이 있는 낭산이 보이고 분황사가 보인다. 고개를 좀 더 북서쪽으로 돌리다 보면 모퉁이에 새로 지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이라고, 구층 목탑을 비슷하게 표현했다는 모형 등 황룡사의 역사와 관련된 유물과 다양한 정보를 주는 곳이라고 한다. 바로 근처에 경주박물관이 있지만, 사람들이 황룡사에 와서 혹 볼거리가 없을까 싶었는지 여러 가지 우려 속에서 지어진 건물이라 한다.

공공건축의 범위는 물론 관 주도로 만들어지는 관공서나 공원 등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같이 보존하고 가꾸어가며 함께 누릴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까지 아우른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는 그 도시 자체로 공공의 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회적인 공유재이면서 한 시절 쓰고 버릴 수 없는 역사적인 공유재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는 아주 중요한데, 지금까지 남아 있던 많은 문화유산이 당대의 필요와 섣부른 판단으로 훼손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업’을 단지 몇번의 공청회를 거쳐 결정하고 섣불리 시행하기에는 역사적인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다.

황룡사 너른 절터는 그곳을 감도는 시간과 바람의 소리를 조용히 듣고 명상하며 역사의 큰 호흡을 같이 느끼는 장소이다. 복원이나 정리가 아주 불필요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런 역사적인 장소를 뻔하고 단순한 볼거리로 만드는 접근은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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