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으면 리얼리스트도 아니다

한겨레 2022. 1. 1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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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 줌으로 출발한 진보정당 운동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민중 후보’ 백기완 후보의 유세에 모인 시민들. 한겨레 자료사진

[세상읽기] 조형근 | 사회학자

“나 경찰 아니야. 서라고. 이야기 좀 해!” 노인이 숨을 헐떡였다. 우리는 줄행랑을 멈췄다. “나도… 지지한다고….” 가쁜 숨 내쉬는 노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1987년 11월 말, 서울 변두리 어느 골목이었다. 직선제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선배와 함께 ‘민중후보’ 백기완의 포스터를 골목 여기저기 붙이고 있었다. 누군가 따라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망을 쳤다. 아직은 군사정권 치하,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런데 쫓아온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목이 멘 채 포스터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아무 말도 묻지 못했다.

그 노인은 얼마 만의 ‘커밍아웃’이었을까? 해방 정국을 이끌던 진보좌파 정치 세력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남한에서 멸종됐다. 살아남은 온건 사민주의자들마저 조봉암 처형으로 이어진 1958년의 진보당 사건과,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 8명이 처형된 5·16 쿠데타 직후의 탄압으로 씨가 말랐다. 공인된 사법살인들이다. 이후 한국 정치는 두 보수우익 정치 세력의 것이었다. 자유당·공화당·민정당 등 독재 세력이 한편에, 민주당 계열 정당들이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둘은 본래 같은 편이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이승만 정권에 함께했고, 반민특위 파괴에도 합심했다. 친일지주 세력이 주축이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이 농지개혁에 저항하면서 정권에서 이탈,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들의 뿌리가 된다. 독재정권이 용공 혐의를 씌울 때마다 ‘정통보수’를 자처하며 항변했다.

우익독재와 정통보수의 세상에서 몇십년 숨죽였던 이들이 저 때부터 조금씩 일어났다. 한 줌으로 출발한 진보정당 운동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으로 정치사회에 돌아왔고, 간난신고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때로 희망의 빛이 되기도 했지만, 자주 절망의 나락에 빠졌다. 세계 유일 분단국, 두 거대 정당의 독식을 보장하는 기형적 선거제도 같은 악조건들이 변명이 된다. 적나라한 분열과 이합집산에서 보듯 제 과오로 무너진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지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섯 개로 갈라진 진보정당들과 민주노총은 끝내 단일화에 실패했고, 대표주자 격인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낮은 지지율로 고민하다 칩거에 들어갔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에 최악으로 치닫는 불평등에도 진보정당의 존재감은 한없이 가볍다.

많은 이들이 정의당이 쇠락한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민주당과 협력하지 않아서 문제였다고도 하고, 민주당에 독립적이지 못해서 문제였다고도 한다. 페미니즘에 몰두한 탓이라고도 하고, 노동 의제에 집착한 탓이라고도 한다. 수권 정당이 되기엔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변혁성을 상실하고 개량화됐다는 시선도 있다. 아예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목표 자체의 생명력이 다했다는 비관적 진단도 있다.

손쉬운 해답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체제 안에서 체제 너머를 지향하는 진보좌파 정당에 이런 정견 대립은 숙명에 가깝다. 현실에 밀착하면서 그 너머 불가능한 세상도 꿈꾸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치열하게 다투되 공존할 수 있는 절차와 양식이 진보정당에 더욱 절실했던 이유다. 고단한 정당정치에 발 담근 적 없는 서생이 할 소리가 못 되지만, 우리 진보정당들에 가장 부족했던 능력일 것도 같다.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일 것이다.

내 처지에서는 진보정당의 쇠락 원인보다는 내 삶에 진보정당이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이 더 절실하다. 진보정당조차 내게는 늘 비판적 지지의 대상이었다. 당원이었던 적도 없다. 지식인의 독립성을 지키겠다는 명분이었지만, 현실의 누추함과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상처받으며 현장을 지킨 이들 덕에 좀 더 평등하고 인간적인 세상이 지식인의 몽상만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 그들에게 묻은 오욕의 일부는 본디 내게 와야 했을 것들이다.

백발노인이 우리를 쫓아온 지 얼마 후인 그해 12월6일 토요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민중후보 백기완의 첫 대규모 유세가 열렸다. 늘 한 줌에 불과한 우리였다. 밤새워 쓴 대자보 수십장을 들고 남루한 마음으로 지하철역을 나서는데 눈앞에 수십만의 인파가 일렁거렸다. 불가능한 꿈 하나씩 갖고 나온 이들이 모여 강물이 됐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날의 감격으로 오늘의 현실을 가릴 수는 없다.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다만 불가능한 꿈도 꾸자. 그 꿈이 없으면 리얼리스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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