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리의 비도 오고 그래서] 소한 추위와 겨울잠

최우리 2022. 1. 1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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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야 한국의 겨울이지."

한국의 겨울이 내 덕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았다.

코로나19로 도시 불빛이 사그라든 올해 겨울도 홀로 빛나는 1등급 별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새봄을 맞기 전 겨울잠을 자는 생명들처럼 웅크리며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진짜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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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리의 비도 오고 그래서]

절기상 가장 춥다는 ‘소한’인 지난 5일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직탕폭포가 한파에 꽁꽁 얼어 있다. 연합뉴스

최우리 | 기후변화팀장

“이래야 한국의 겨울이지.”

롱패딩을 입었지만 얼굴을 때리는 칼바람은 피할 수 없다. 11년 전 캐나다 밴쿠버로 떠난 친구가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수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하느라 바빠서 연락도 잘 못했는데,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갑게 대화하다 자리를 옮기던 중 친구가 말했다. 한국의 겨울이 내 덕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았다. 밴쿠버의 겨울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비가 자주 오고 흐리다. 반면 서울의 겨울은 맑고 쨍한 대신 춥고 건조하다. 아플 만큼 추워서 괴로울 때도 있지만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아마도 술 마신 다음날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해장국 같은 맛이 아닐까 싶다. 한 해 중 이 겨울이 없다면 무척 서운할 것 같다.

기후변화로 계절별 강우량의 기존 문법이 깨지고 있긴 하지만, 한국 겨울은 한 해 중 가장 건조한 계절이다. 대기가 건조하기 때문에 하늘도 거울을 보듯 깨끗하다. 특히 밤사이에도 대기가 안정적이어서 별을 보기 좋다. 코로나19로 도시 불빛이 사그라든 올해 겨울도 홀로 빛나는 1등급 별들을 볼 수 있었다. 지난해 마지막 날 아파트 옥상에서 별을 보며 2021년과 혼자만의 이별식을 했다. 올해도 참 아등바등 애를 쓰며 살았구나, 내 욕심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줬나, 왜 이렇게 살아야 했나…. 매년 조금씩이라도 성숙해지면 좋을 텐데 그게 참 쉽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새해맞이의 설렘도 점점 뒤늦게 찾아오는 걸 느낀다. 1월이 보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은 지난해에 머물러 있다. 이때마다 소한(1월5일)과 대한(1월20일) 사이는 한 해 중 가장 추운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찾고는 한다.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한 해를 시작하는 1월 초·중순은 한 해 중 가장 추운 날들이 이어진다. 마치 새봄을 맞기 전 겨울잠을 자는 생명들처럼 웅크리며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진짜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음력설이 지나 입춘이 되어야 임인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지난해 이 칼럼을 통해 ‘날씨 일기’를 쓰자고 제안했다. 나의 경우 그날 만난 사람과의 대화와 함께 그날의 날씨를 적곤 했다. 새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지난해 만났던 이들과 함께한 날씨의 공기를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고 있다. 날이 좋아서, 날이 흐려서, 날이 추워서, 날이 더워서, 문득 좋았던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 반갑고 고마웠던 순간들과 미안하고 부끄러웠던 순간들이 기억에 재저장될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는 지금의 시간들이 지난해의 추억들을 내 몸 어딘가에 있는 장기기억장치로 이동·저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올해도 날씨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도 날씨 덕분에 더 크게 웃을 수 있고, 혹은 날씨 때문에 더 크게 울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펴낸 ‘기상예보와 날씨에 따른 금융소비자의 행태 변화’ 보고서를 보니 기상특보가 발효된 날의 코스피 하락폭이 특보가 없는 날보다 컸다. 특히 호우주의보와 한파주의보가 발표된 날은 다른 특보가 발표된 날보다 더 떨어졌다. 날씨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날씨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날은 생각보다 적을 것이다.

아직 새해 계획을 세우지 못했지만, 올해도 ‘날씨 일기’를 쓰면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지켜가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계절 변화를 느끼는 데 집중하다 보니 어른이 되어버린 뒤 이어지는 ‘노잼’ 일상이 좀 더 다채로워졌다. 또 한 해가 지나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소한 추위도 금세 그리워질 듯하다.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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