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딱 7글자' 정치와 짧은 글자수의 권력

이승준 2022. 1. 1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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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 이슈팀장

말의 길이는 권력을 드러낸다. 기자들이 거리에서, 현장에서 만난 힘없는 이들의 말은 길고, 복잡하고, 구체적이다. 억울함이 클수록, 피해가 심할수록, 도움이 필요할수록 말은 길어진다. 어떤 이들은 자기 생애사를 구구절절 풀어내야 할 때도 있다. 원통하고, 답답한 일들을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이래야 세상이 자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척이라도 하니까. 지하철 시위에 나서는 장애인들은 2001년 오이도역 휠체어리프트 추락 사고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성폭력·직장갑질 피해자들은 피해를 구제받고, 가해자의 책임을 묻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예산과 법을 집행하거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말은 짧고, 단순하고, 모호하다. “예산이 없습니다”, “현행 제도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평소 불성실한 사람이라서…”. 때로는 침묵하기도 한다. 짧고, 단순하고, 모호한 말은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가진 강자들의 무기다. ‘변화’나 ‘진실 규명’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약자들의 말에 길고 구체적인 말로 의미를 부여하면 기득권이나 강자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짧고 모호한 말은 언제든 뒤집을 수 있다. 입장을 바꾸고 상황을 무마하기 좋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약자들도 자신의 말을 짧게 벼린다. 억울함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일 때,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할 때 자신의 말을 다듬어 구호로 외친다. ‘차별금지법 제정’, ‘저상버스 도입’,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 여의도를 넘어선 넓은 의미의 ‘정치’가 시작된다. 하지만 애초 가진 권력이 별로 없기에 짧은 구호는 온갖 공격에 시달리고 이를 반박하고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다시 길고 긴 설명을 해야 한다.

수년 전, 국회 출입기자를 했을 때 ‘모드 전환’ 하는 데 애를 먹었다. 사회부 기자 때는 1시간을 이야기해도 모자라 하는 이들의 긴 이야기를 어떻게 줄여 전할지가 고민이었다면 국회 문턱을 넘어선 순간 짧고, 때로는 모호한 정치인의 말과 글을 어떻게 전할지 전전긍긍했다. 짧은 말로 진실을 가리고 말을 뒤집는 정치인들의 말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여의도 문화’에 당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인의 짧고 단순한 언어가 때로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깨닫게 됐다. 실제로 국회 밖의 외침을 적확한 말로 다듬어 법을 바꾸고, 필요한 예산을 늘리는 정치인들도 분명 있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7일 페이스북에 올린 일곱 글자 게시물. 윤석열 후보 페이스북 갈무리

그런데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시작한 ‘여성가족부 폐지’, ‘주적은 북한’ 등 ‘일곱자 단문 정치’, ‘멸공 챌린지’ 등‘밈(온라인의 짧은 이미지) 정치’가 화제가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당혹스럽기만 하다. 누군가를 설득해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인의 언어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단문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부재하고, 짧은 글의 의미를 묻는 말에도 모호한 답이 돌아온다. 일곱 글자가 누군가의 절절한 고통이나 구체적 피해를 고려해 압축하고 다듬은 것인지 물음표만 찍힌다. 특정 지지층을 열광시킨 성공적인 선거전략이라는 긍정 평가와 ‘나쁜 갈라치기’라는 부정 평가가 엇갈린다.

일곱자는 쉽고 단순하지만, 결국 여성가족부의 다양한 지원을 받는 이들은 여성가족부가 왜 필요한지 길고 긴 이야기를 다시 해야 했다. ‘멸공의 주역’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들도 “우리에게 끼치는 여파도 생각하라”고 호소를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온라인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공론장을 점점 좌우하면서 길고 복잡한 내용 대신 짧고 재밌는 메시지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건 시대적 흐름이다. 거대담론에 지친 이들이 단순한 것에 열광하는 것도 변화일 것이다. 정치가 반응할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러나 ‘평화로운 7자의 세계’의 밖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길고 긴 이야기를 힘겹게 꺼내야 하는.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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