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하고 유연하게 먹자, 플렉시테리언으로 가는 길
종이에 '플렉시테리언이 되기'라고 써보았다. 나는 내가 더 이상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선생님도 되고, 화가도 되고, 엄마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되고 싶은 사람은 점점 멀어지고 될 수 있는 사람에 가까워지며 지금의 내가 됐다. 조각들이 모여 완성된 '나'라는 모습을 아끼며 살다 언제부터인가 '플렉시테리언'이 되고 싶었다. 흐트러진 퍼즐을 맞추듯 플렉시테리언이라는 조각을 하나씩 스스로에 붙여 볼 셈이다. 어디에서 의외의 조각이 날아와 내게 또 붙을지 모르지만.
다채로움과 풍성함으로 완성되는 플렉시테리언
플렉시테리언은 느슨한 채식가다. 주로 채식하지만 때때로 고기와 육류, 달걀과 유제품도 먹는다. 한 번에 섞어 먹기도 하고 구분해 먹기도 한다. 섞어먹을 경우 늘 먹던 식단(비채식 식단)에서 동물성 식품을 빼고 대체 재료를 찾아 넣는 방법이 가장 수월하다.육류와 해산물, 달걀과 유제품을 제외하더라도 식단을 풍성하게 구성할 수 있다. 재료를 골고루 선택하고 다양한 조리법으로 음식을 만들면 색과 향, 맛과 식감에 무궁무진한 변주가 가능하다. 다만 영양성분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지 살펴보는 게 좋다.
곡물로부턴 탄수화물을 얻을 수 있다. 식물성 재료에서 얻은 기름과 씨앗, 견과류엔 좋은 지방이 가득하다. 콩과 콩 가공식품엔 단백질이 풍부하다. 비타민과 미네랄, 수분은 다양한 채소와 과일이 충분히 머금고 있다. 행여 부족할 수 있는 칼슘은 미역과 다시마 등 해조류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그렇다면 이 다양한 재료 중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할까.
섭취해야 할 영양성분을 필요량 기준으로 나열하면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과 미네랄 순서다. 이중 단백질은 채식만으로 필요량만큼 얻기 어려울 때가 많다. 콩이나 콩 가공식품만 먹기엔 금방 물려버린다. 이럴 때 플렉시테리언은 생선 한 토막, 오징어 반 마리, 닭 가슴살 한 쪽 등을 먹어 허전함을 메울 수 있다.
한 가지 더. 채소와 과일은 하나같이 흙에 뿌리를 두고 수분, 햇빛, 공기를 먹으며 자라지만 저마다의 고유한 색이 있다. 이러한 색을 만들어내는 화학물질은 피토케미컬이다. 이 물질을 먹으면 체내에 강력한 항산화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붉은 색은 혈관에 좋은 라이코펜, 녹황색은 면역력에 좋은 베타카로틴, 초록색은 유해물질을 배출하는 클로로필, 보라색와 검정색은 세포 손상을 방지하는 안토시아닌, 흰색은 항균에 뛰어난 알리신 성분이 들어 있다. 음식을 만들 때 알록달록 색의 조화를 꾀하는 것만으로도 좀 더 건강해질 수 있다.
푸짐한 한 끼로 즐기는 채식
고소한 수프는 양파와 주재료를 버터에 볶아 곱게 간 것에 생크림 또는 우유를 넣고 뭉근히 끓여 만든다. 대개 양파와 주재료가 풍미를 낸다. 버터는 올리브 오일로 바꾸고 생크림이나 우유는 물로 대체한다. 맹물을 쓰기 싫다면 채수(끓는 물에 채소를 넣고 바로 불을 끈 뒤 하루 동안 푹 재운 것)를 만들어 써도 좋다. 수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채소는 감자, 단호박, 고구마, 당근, 콩(완두콩이 맛있다), 버섯, 토마토, 파프리카, 대파, 우엉, 무 등 다채롭다. 여기에 셀러리, 파슬리, 타임, 오레가노처럼 향긋한 재료를 더해보자. 나는 고수를 뜯어 넣겠지만 그건 취향의 문제니까.
푸짐하게, 한입 가득 씹는 맛으로 한 끼를 채우고 싶다면 굽고, 돌돌 말고, 겹쳐 쌓아보자. 채소와 과일을 구우면 몸속에 있는 진한 맛이 더 나온다. 쓴 맛, 떫은 맛, 아린 맛 같은 거센 부분은 오그라들고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오일과 소금, 후추를 곁들여 너무 타지 않게 잘 구우면 된다. 튀김도 맛있다. 튀길 때는 강황(또는 카레)가루나 말린 허브를 곱게 부숴 튀김옷에 섞는 것을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즐겨 먹는 국수와 밥 종류는 언제나 채소의 든든한 지원군임을 잊지 말자. 국수와 밥 요리에 고기나 해산물, 달걀을 들어낸다고 해서 맛이 없어지거나 식감이 심심해지는 일은 잘 없다. 혹시 아쉽다면 견과류와 씨앗, 마른 과일이나 채소, 묵은 나물, 다양한 허브와 식물성 기름(매운 고추기름을 포함)이 도움이 될 것이다.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Copyright © 신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