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굿] ③숙명처럼 이어진 심방의 삶과 길

변지철 2022. 1. 1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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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어둑엉 3년, 귀 막앙 3년, 말 몰랑 3년, 오장 썩어 3년"
"제주 전통 원형 유지하며 알기 쉽게 전승 발전시켜야"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예부터 인간이 신과 만나기 위해 행하는 의례인 '굿'은 제주에서 심방을 통해 이뤄진다.

"풍어와 안전을 비나이다" (제주=연합뉴스) 지난 2018년 3월 30일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칠머리당에서 영등송별제가 봉행 되고 있다. 이 굿은 해마다 '영등달'인 음력 2월 초하룻날 제주에 찾아왔다가 열나흗날 떠나는 '영등할망'을 보내는 무속 제례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보통 심방은 '무당'을 뜻하는 제주어라고 소개된다.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심방의 어원이 '신(神)의 형방(刑房)'이란 말이 축약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제주의 심방은 입무(入巫)의 과정, 영향력, 전승 형태 등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당과 달리 특별한 면이 있다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이자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인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의 김윤수(76) 심방과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인 '제주큰굿'의 서순실(61) 심방을 인터뷰했다.

연합뉴스는 지난해 2월 26일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에서 김윤수 심방을, 이어 12월 23일 제주시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서순실 심방을 각각 만났다.

주변 시선 딛고 세계무형문화유산까지

"이렇게 천대를 받으면서까지 굿을 해야 하나!"

수십 년이 지난 오래전 일이었지만 김윤수 심방은 여전히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훔쳐야 했다.

심방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었다.

무속신앙이 생활의 일부와 다름없던 과거에도 만만치 않은 고된 삶이었지만,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무속을 천시하는 주변의 시선은 너무나 매서웠다.

그는 14∼15살 때 증조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 큰아버지의 대를 이어 4대째 심방의 길에 들어섰다.

자주 머리가 아프고 피곤해 병원에도 다녀보고 침도 맞아 봤지만, 소용이 없자 "심방 일을 배워 큰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병이 낫는다"는 큰어머니의 말을 듣고 심방이 된 것이다.

인터뷰하는 김윤수 심방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지난 2022년 2월 26일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에서 김윤수 심방이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굿을 배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주변의 시선을 견디는 게 더욱 힘들었다.

김 심방이 큰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굿을 배우던 19살이었다.

당시 제주시 한림읍의 한 가정집에서 굿을 하던 중 김 심방은 누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피투성이가 됐다. 결국, 돌을 던진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김 심방은 '굿을 안 하면 못 살겠느냐. 그만두자!'고 마음먹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결국, 1년도 안 돼 제주도로 내려와 다시 굿을 하러 다녔다.

난관은 또 이어졌다.

새마을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진 '미신타파' 운동으로 인해 큰 수난을 겪었다.

김 심방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굴속에서 굿을 하거나 소나무 숲속에 천막을 치고 굿을 해야 했다.

군대에 입대해 하사관으로 복무하며 잠시 사회의 멸시를 피하기도했다.

사회 분위기가 바뀐 건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1980년 11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부터다.

초대 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로 인정받은 고(故) 안사인 심방이 김윤수 심방에게 "윤수야! 우리 함께 제주 무속굿을 살려보자!"며 손을 내밀었다.

김 심방도 흔쾌히 응했다.

이후 김 심방은 안사인 심방과 함께 칠머리당영등굿은 물론 다양한 제주의 굿 보전 활동을 벌였고, 안 심방이 타계한 뒤 1995년에는 칠머리당영등굿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제주=연합뉴스) 지난 1992년 3월 17일 제주시 수협 위판장에서 열린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굿 영등송별대제 발표회에서 당시 보유자 후보인 김윤수 심방이 영등신에게 어부와 해녀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굿을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어 2009년에는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를 이끌며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김 심방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굿을 어려워하고 범접하기도 쉽지 않다"며 "(새봄을 여는 탐라국 입춘굿 등을 예로 들면서) 학생들과 젊은 사람들이 알기 쉬운 요소를 갖춰 굿이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관광객의 이목을 끌려고 축제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데 제주 전통과 원형, 그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과 함께 하되 원형을 유지하면서 전승,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큰굿 전통 어떻게 잇나 "눈앞이 깜깜"

"눈 어둑엉 3년, 귀 막앙 3년, 말 몰랑 3년, 오장 썩어 3년…."

서순실 심방은 심방이 되는 과정을 제줏말로 짧게 이처럼 표현했다.

서 심방은 "눈으로 못 볼 걸 봐도 참아라. 귀로 나쁜 말을 들어도 그 말에 동요하지 마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을 조심하여라. 나쁜 말을 듣고 욕을 들어 가슴이 아파도 꾹꾹 안으로 눌러 넣고 참으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심방의 길에 갓 들어섰을 때 가슴속에 새겨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들었던 스승의 가르침이다.

어렸을 적부터 신병(神病)을 앓았던 서 심방은 14살에 외증조할머니와 어머니의 대를 이어 3대째 심방이 됐다.

심방이 되지 않으면 병을 앓다 17살에 요절한다는 얘기를 듣자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이었지만 마치 숙명과도 같았다.

인터뷰하는 서순실 심방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지난해 12월 23일 제주시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제주큰굿보존회 회장인 서순실 심방이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어린 나이에 입무(入巫)한 뒤 서 심방은 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인 안사인 심방과 제주큰굿 보유자인 이중춘 심방으로부터 굿을 전수하였다.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자신은 홀로 굿을 배운다는 게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마다 스승들의 격려가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었다.

서 심방은 칠머리당영등굿 최연소 전수장학생이 돼 어깨너머로 영등굿을 배웠고, 20대 후반 들어 이중춘 심방을 만나면서 제자로 인정받아 제주큰굿 전수장학생이 됐다.

연물(演物, 제주에서 장구·징·북·설쇠 등 악기를 일컫는 용어)을 익히고, 기메(종이를 갖가지 형상으로 오려 굿을 하는 장소에 걸어놓는 것)를 만들고, 굿에 쓰일 떡을 하고, 대를 세우는 등 갖가지 일을 눈치껏 배웠다.

하지만 큰굿을 20년 남짓 배우고 있을 무렵인 2011년 5월 스승인 이중춘 심방이 세상을 떠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전수장학생 신분이었던 서 심방이 제주큰굿을 책임져야만 했다.

서 심방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자칫 제주의 무형문화재인 큰굿의 대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엄습했다.

다행히도 같은 해 제주도와 한국방송공사(KBS), 제주전통문화연구소 등이 함께 제주큰굿 기록화 사업을 진행하고, 서 심방이 참여하게 되면서 기틀을 다질 기회가 마련됐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마방집에서 한 달 동안 밤낮으로 이어진 굿을 진행하면서 하루 2시간30분 밖에 자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자신감이 붙었다.

제주 큰굿 시연 (제주=연합뉴스) 지난 2013년 3월 24일 국립제주박물관 마당에서 제주 큰굿이 시연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 심방은 무속신앙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 빈약한 지원 속에도 문화예술계와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제주큰굿보존회를 세워 큰굿의 명맥을 이어왔다.

서 심방은 스승인 이중춘 심방의 타계 후 9년 만인 2020년 5월 제주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3호 제주큰굿의 보유자로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1년 12월 22일 제주큰굿이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 심방은 "이중춘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인데 이것을 내려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꾹꾹 눌러 참으면서 굿을 이어왔다"며 "제주큰굿보존회 회원 8명이 합심한 결과이고, 주변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의 굿이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인식을 했으면 한다. 우리 조상들의 것으로 제주도민의 재산이자 우리나라의 재산이다. 도민들이 잘 지켜주시고, 국민들도 함께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한을 풀게 하는 제주의 심방

제주의 심방은 예부터 민중의 한(恨)을 풀어주기 위해 굿을 하는 사람이다.

굿은 인간이 신과 만나기 위해 행하는 의례다.

제주목관아에서 열리는 탐라국 입춘굿 (제주=연합뉴스) 지난 2016년 2월 4일 제주시 제주목 관아에서 '2016 병신년 탐라국 입춘굿'이 제주큰굿보존회 주관으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심방은 굿에서 신들의 이야기인 본풀이(신화)를 읊어 신을 칭송하고 신을 기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신에게 대신 기원하고 신들이 도와주길 바란다.

심방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과 인간을 잇는 사제(司祭)의 역할, 점을 쳐서 신의 뜻을 알아내는 역할, TV도 없고 연극 무대도 없던 시절 일종의 예능인 역할 등을 담당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예능인의 역할이다.

심방이 하는 굿은 노래와 춤, 신화, 연극 등 다양한 요소로 이뤄졌다.

심방이 사설 속에 제주의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가 녹아들어 민중에게 전달되고, 춤과 연극적 요소가 가미돼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민속학자 문무병 박사는 저서 '제주도 무속신화'를 통해 "심방은 구성진 소리와 푸짐한 해학, 자연스러운 춤을 통해 민중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문 박사는 "심방이 굿을 잘한다는 것은 집안이나 마을 사람들의 연유 즉, 굿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잘 닦아주고 신을 잘 청하고, 무점을 잘 쳐서 신의 뜻을 제주(祭主)에게 잘 전달해 제주의 가슴을 찌르는 그럴듯한 사설로써 맺힌 한과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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