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으로 넓은 세계 본 연암..현대인도 편견 깨뜨려야"

박상현 2022. 1. 16.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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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연구' 개정판 낸 김명호 전 교수.."개화사상 뿌리는 실학"
"박지원 평전 저술이 목표..학술 성과, 공공재로 활용되길"
'연암 연구자'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열하일기 연구' 개정판을 펴낸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가 서초구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이 1780년 청나라를 다녀와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문제작이었다. 정조는 1792년 열하일기를 문제 삼아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하며 잡문 대신 옛 문장을 쓰게 했다.

하지만 열하일기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금도 내용이 조금씩 다른 이본(異本)이 50종 넘게 전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열심히 베껴서 읽었다는 근거다.

조선 사신이 중국을 방문한 뒤 남긴 연행록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런데도 열하일기에 대한 반응이 유독 뜨거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40년 넘게 연암을 연구한 김명호(69) 전 서울대 교수는 지난 11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연암은 개방적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넓은 세계를 보고자 했다"며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은 뒤 발전상을 직시하고 배우려 했다"고 강조했다.

김 전 교수는 최근 도서출판 돌베개를 통해 '열하일기 연구' 개정판을 32년 만에 내놓았다. 이 책은 열하일기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학술서로, 개정판에는 초판본 내용을 보완한 글과 열하일기 문체·이본 등을 분석한 논문을 추가로 실었다.

연암은 건륭제 칠순 잔치에 참석하려고 베이징을 거쳐 황제의 별궁이 있던 열하, 즉 청더(承德)로 향했다. 열하일기는 기행문으로 알려졌지만, 중국에서 목격한 새로운 문물을 자세히 기록한 보고서이자 다양한 문체를 선보인 탁월한 문학서였다.

김 전 교수는 연암이 성리학과 명나라 중심 사고방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당대 사대부들의 폐쇄적이고 오만한 가치관을 허물기 위해 해학과 풍자를 섞어 글을 지었다고 풀이했다.

그는 "조선 후기에 소중화사상이 퍼지면서 자아도취가 심해졌지만, 실상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가 조선이었다"며 "연암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우화나 농담을 통해 눙쳐가면서 유연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열하일기에서는 근본적으로 연암처럼 사고를 새롭게 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한국은 개방된 사회 같지만, 선입견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정보도 국내 시각 중심으로 유통되고요. 지금도 연암처럼 개방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편견을 깨려는 자세가 필요해요. 그런 점에서 열하일기는 살아 있는 고전이라고 할 수 있죠."

김 전 교수는 연암 연구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 젊은 시절 개인의 실존적 고민과 사회적 분위기가 두루 작용한 결과라고 털어놨다.

당시 그가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는 주체성과 근대화였다. 성숙한 자아를 확립하고, 일제 지배와 서구화 이전에 이뤄진 한국 근대화의 기원을 문학을 통해 추적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마침 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자주적 근대화의 흔적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김 전 교수는 "전통을 알고 싶어 고전문학을 택했는데, 한국학을 하려니 별도로 한문을 공부해야 했다"며 "선배 소개로 한학자인 우전 신호열 선생님 댁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이어 "선생님께서 토요일이면 박지원 문집인 연암집 특강을 했는데, 1981년부터 작고하신 1993년까지 12년간 참여했다"며 "처음에 고전문학은 사상적 깊이가 얕고 낡았다는 선입견을 지녔는데, 연암의 저작은 참신하고 현대적일뿐더러 매우 재미있어서 몰두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연암 연구자'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열하일기 연구' 개정판을 펴낸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가 서초구 자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했던 열하일기를 바탕으로 학문 성과를 축적한 그는 '열하일기 연구' 개정판에서 조선 사회에 미친 서학의 영향을 더욱 강조했다.

최근 학계 한편에서는 조선 후기에 등장했다고 알려진 '실학'을 두고 회의적인 견해가 대두하고 있다. 박지원·박제가·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은 어디까지나 유학자였고, 실학은 독자적 학문이 아닌 학풍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전 교수는 "실학이 존재했다는 나름의 확신이 있다"며 "우리나라 성리학 역사를 돌아보면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까지 1차 혁신이 있었고, 실학이 2차 혁신이었으며, 3차 혁신은 근대에 시도됐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실학이 가져온 혁신의 원동력은 서학에 있었다"며 "조선이 서학을 조금 더 빠른 시기에 주체적으로 수용했다면 19세기 이후 세도정치나 쇄국정책이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고 서구 세계에도 여유 있게 대응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교수는 홍대용이 중국을 다녀온 뒤 연암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친중 지식인 네트워크'가 형성됐고, 서학과 실학을 중시한 이들의 학문이 연암 손자인 박규수까지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또 구한말 개화파의 사상적 뿌리를 찾다 보면 실학과 만나게 된다고 역설했다.

"누군가는 역사를 만들어낸다거나 시대착오라고 할지 모르지만, 문헌을 보면 실학이 개화파에 끼친 영향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점으로 있는 것을 선으로 엮지 못했던 것이죠. 이러한 사실을 발굴하지 않는 건 지적 게으름 탓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국가 위상을 높이기 위해 자국 근대 사상을 엄청나게 연구하고 있어요. 우리도 근대화 과정을 복기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글쓰기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다는 김 전 교수가 목표로 삼은 과업은 연암 평전 저술이다. 그는 연암이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문호라면 제대로 된 평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전 교수는 "이제 평전을 낼 준비는 거의 끝났고, 원고는 3분의 1 정도 완성했다"며 "노년의 연암과 나이가 비슷해지면서 벗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연암이 흡족해할 만한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골방에서 외롭게 하는 작업의 결과물이 묻히지 않고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사회 공공재로 활용되길 바란다"며 "정통파 학자들이 밀도 있는 저작을 발표했을 때 널리 유통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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