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를 상징하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Santa Maria del Fiore). 여행자들은 보통 ‘피렌체 두오모(Duomo)’라 부르죠.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20살에 헤어진 준세이와 아오이가 10년 뒤 아오이 생일에 재회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영화 덕분에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연인들의 성지’가 됐죠.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이탈리아 여행지 1위로 꼽힙니다. 이에 많은 연인들이 영화 주인공처럼 두오모 맨 꼭대기 쿠폴라(Cupola)까지 오릅니다. 어지럽게 회전하는 나선의 464개의 가파른 계단. 허벅지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20여분을 올라 드디어 쿠폴라에 섭니다.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피렌체 시내 풍경.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등 조각품들을 만나는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 우피치 미술관 그리고 저 멀리 미켈란젤로의 언덕까지. 그림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숨을 멎게 만듭니다.
#냉정과 열정사이 그리고 슈퍼 투스칸
하지만 정작 쿠폴라에 오르면 쿠폴라는 잘 보이지 않고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유명한 ‘조토의 종탑(Campannile di Giotto)’만 눈앞에 바짝 다가 서 있답니다. 그래서 다시 내려가 피렌체 두오모 보다 더 가파른 조토의 종탑 414개 계단을 투덜대며 오르기 시작합니다. 역시 허벅지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때쯤 종탑 꼭대기가 등장하는 군요. 숨을 헐떡이며 밖으로 나서자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은 그동안의 수고를 보상하고도 남습니다. 아름다운 쿠폴라를 머리에 얹은 피렌체 두오모 풍경에 가슴이 마구 요동칩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조토의 종탑을 나서자 두오모 광장이 저녁노을로 물들더니 얼마안가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짧은 시간에 두 곳 878개 계단을 오르내리는 강행군을 했더니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네요. 미리 점찍어 놓았던 피렌체 중앙시장(Marcato Centrale di Firenze)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두오모 광장에서 걸어서 7분 남짓한 거리이고 다양한 음식들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어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랍니다. 2층으로 올라서자 곳곳에서 여행자들의 왁자지껄한 대화와 음식 냄새가 어우러지며 활기가 넘칩니다. 피자, 파스타, 딤섬, 샐러드, 프로슈트, 하몽, 올리브, 연어 그리고 다양한 치즈까지 없는게 없네요. 많은 음식과 식재료를 구경하느라 시각과 후각이 즐거워 집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애타게 찾던 곳을 발견합니다. 바로 와인샵&바. 마침 슈퍼 투스칸(Super Tuscan) 와인 3종세트를 60유로에 맛볼 수 있다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와인 애호가들이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사시카이아(Sassicaia) 2016, 티냐넬로(Tinanello) 2015, 구아도 알 타쏘(Guado Al Tasso) 2015입니다. 흠, 60유로라니. 한국 돈으로 8만원이 넘는데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여행자들이 선뜻 지갑을 열기 쉽지 않네요. 와인이 넘쳐나는 곳이지만 원조 슈퍼 투스칸들이라 가격이 만만치 않군요. 더구나 설명은 ‘half glass’로 준다고 하지만 실제 양은 글라스의 ‘반에 반’ 정도 돼 보입니다. 여행 경비가 거의 바닥날 즈음이라 고민하다 사시카이아 4분의 1 글라스를 주문합니다. 20유로를 받는데 약 30㎖ 정도로 정말 한 모금도 안 되는 군요. 쩝, 입맛만 다시게 됩니다. 그래도 맛있는 와인을 마시는 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입니다. 코로나19가 물러가면 다시 가서 다양한 슈퍼 투스칸들을 즐기고 싶네요.
#슈퍼 투스칸과 IGP 등급의 탄생
슈퍼 투스칸은 토스카나 서쪽 해안가의 볼게리(Bolgheri)가 고향입니다. 소금기 묻은 바닷바람 때문에 좋은 포도가 나올 수 없다고 여겨졌고 토착품종인 산지오베제 재배에 적합하지 않아 외면받았답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1968년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이 탄생하는데 바로 슈퍼 투스칸의 원조 사시카이아 랍니다. 이탈리아 와인은 정부에서 공인한 생산지 규정 품질 등급인 DOCG(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e Garantita)와 DOC를 받으려면 산지오베제 등 토착품종을 사용해야하고 양조 규정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가장 낮은 ‘테이블 와인(Vino da Tavola)’ 등급을 받게됩니다.
하지만, 일부 생산자들은 전통을 따르지 않고 국제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으로 기존의 토스카나 와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을 빚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DOCG 등급을 뛰어넘는 토스카나 최고 품질의 와인이 탄생했고 이를 슈퍼 투스칸이라 부릅니다. 사시까이아를 계기로 티냐넬로(Tignanello), 솔라이아(Solaia), 오르넬라이아(Ornellaia)가 잇따라 선보이면서 이탈리아 와인은 중흥기를 맞게 됩니다. 등급은 테이블이지만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리자 이탈리아 정부는 난처해졌고 뒤늦게 해결책을 만들어 슈퍼 투스칸을 끌어 들이는데 바로 새로운 IGP(Indicazione Geografica Protetta)등급입니다. 요즘은 볼게리를 포함해 토스카나 전역에서 IGP 등급의 슈퍼 투스칸이 선보이고 있답니다.
#예술의 거장들 그리고 피렌체 화가가 빚는 꼴로레(Colore)
와인 향기 가득한 피렌체는 거장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예술의 도시입니다. 쿠폴라를 오르다 보면 천장 내부를 덮은 거대한 프레스코화 ‘창세기’와 ‘최후의 심판’이 압도하는데 조르조 바사리와 제자들의 작품입니다. 피렌체 두오모 건설과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극찬한 산 조바니 성당 청동문 조각을 둘러싼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로렌초 기베르티, 두 거장의 세기의 대결도 살아 숨 쉽니다. 베키오궁과 회랑 사이 골목에 우피치 미술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카라바조의 작품들이 가득하고 피카소가 매일 찾아와 데생한 것으로 전해지는 우첼로의 ‘산 로마노의 전투’도 만나죠.
이런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예술가의 DNA를 와인에 심은 이가 바로 화가이자 와인메이커인 비비 그라츠(Bibi Graetz)입니다.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델라르떼(Accademia Delle Arte)에서 예술을 전공한 그는 모든 와인의 레이블을 직접 그립니다. 그의 부친 기든 그라츠(Gidon Graet)도 유명한 금속 조각 예술가로 Rise of Icaros (1979 in New York), Phoenix (2004 in Berlin), Mind, Body and Spirit(1988 in LA) 등 뉴욕, 시카고, LA, 베를린, 취리히, 피렌체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그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답니다. 피렌체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받은 집안의 예술 DNA가 비비 그라츠 시대에 와인으로 꽃 피운 것 같네요.
비비 그라츠는 집안 대대로 살던 피렌체의 아름다운 빈칠리아타 성에서 2000년 와이너리를 시작해 2020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와인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표현해 예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지중해 푸른 바다를 한껏 품은 레이블로 유명한 테스타마타(Testamatta)와 토스카나의 불타는 태양을 담은 꼴로레(Colore)는 레이블 그림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뛰어납니다. 예술가적인 재능이 에로티시즘으로 극대화된 와인 소포코네 디 빈칠리아타(Soffocone di Vincigliata)도 있습니다. 소포코네는 이탈리아 사투리로 ‘오럴섹스‘를 뜻한답니다. 나체의 여인과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상징을 담은 매우 파격적인 레이블로 화제를 불러 모았죠. 비비 그라츠의 포도밭은 인근 마을 청춘남녀들에게 밀회 장소로 소문이 나면서 아예 ‘소포코네 포도밭’으로 공공연하게 불렸는데 이런 포도밭에서 사랑을 나누는 이런 청춘들의 모습을 상상의 나래를 펼쳐 아주 관능적인 붓터치로 레이블에 담았습니다.
꼴로레는 비비 그라츠의 역량이 모두 집약된 아이콘 와인입니다. 비비 그라츠는 포도 본연의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 천연 효모를 사용하고 오픈 배럴에서 발효하는 전통적 양조 방식을 고집하며 모두 유기농으로 와인을 빚습니다.
꼴로레는 제임스 서클링이 선정한 2016년 슈퍼 투스칸 톱10에 사시카이아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모래와 자갈이 섞인 척박한 갈레스트로 토양에서 자란 평균 수령 90년 이상 포도나무만 사용해 연간 6000병 정도만 소량 생산합니다. 토착품종으로만 빚으며 산지오베제 80%에 카나이올로(Canaiolo), 꼴로리노(Colorino)를 10%씩 블렌딩합니다. 30개월 오크 숙성 후 병입해 18개월 추가 숙성한 뒤에 출시하니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 탄생합니다. 산지오베제는 와인의 골격인 구조와 힘을 부여하고, 꼴로리노는 과일과 벨벳 같은 타닌을, 까나이올로는 미네랄과 파워를 곁들입니다. 블랙체리 등 검은 과일과 스파이시한 아로마, 쵸콜릿 풍미가 어우러지네요. 탄닌은 둥글둥글하면서도 강렬하고 산도는 엣지있게 살아있습니다.
최근 비비 그라츠 탄생 20주년을 맞아 전 세계 6개 도시에서 꼴로레의 다양한 빈티지를 시음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15, 2016, 2018, 2019 빈티지가 소개됐습니다. 비비 그라츠 와인은 와이넬에서 수입합니다. 2015와 2016은 둘 다 뛰어난 날씨 덕분에 토스카나의 위대한 빈티지로 분류됩니다. 꼴로레 2015는 감초 등 다양한 허브향과 스파이시, 젖은 흙에 애니멀 노트가 살짝 느껴집니다. 블랙체리 등 검은 과일향이 지배적인데 말린 자두와 쵸콜릿 향도 올라오고 크리미한 바닐라 노트도 희미하게 다가옵니다. 산도가 짱짱해 아직도 영한 느낌이고 탄닌은 부드럽지만 알코올 살짝 튀는 것을 보니 좀 더 숙성이 필요해 보입니다. 비비 그라츠는 시음 노트에서 모든 것이 제역할을 한 완벽한 빈티지로 평가하네요. 그는 산도, 구조감, 탄닌의 밸런스가 뛰어나고 우아함과 무농축이라는 새로운 철학이 표현된 최초의 빈티지로 역사에 남을 빈티지라고 시음 노트에 적습니다. 놀라운 구조감과 순수한 과일향, 그리고 인상적인 파워를 두루 갖췄다고 합니다. 꼴로레 2016은 다양한 꽃이 만발한 정원에 서 있는 듯 싱그러운 꽃향이 지배적으로 느껴지네요. 검고 붉은 과실이 모두 존재하고 삼나무와 다양한 허브는 2015보다 좀 더 풍부합니다. 전반적으로 2015보다 밀도감이 더 뛰어납니다. 비비 그라츠는 2016년은 ‘조각적인 빈티지’로 표현합니다. 그는 “포도밭을 둘러보면 모든 포도송이가 작은 청동 조각품처럼 보였고 2016년에는 이런 조각적인 구조감이 와인의 특징으로 반영됐다”고 설명하네요.
비비 그라츠는 꼴로레 2018 빈티지는 ‘야생(wild)’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릴 정도로 파워풀하고 숙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합니다. 예년보다 선선했던 날씨라 포도나무 자체의 균형에 손대지 않기로 결정했고 트리밍 작업을 하지 않은 나무에서 생산된 포도는 와인에 독특한 향기를 제공했다는 군요. 2019 빈티지는 좀 더 우아하면서 생기가 넘치는 아주 익사이팅한 와인입니다. 2019 빈티지에는 시에나 북쪽 라몰레 빈야드 포도가 추가됐는데 강력한 바이올렛 플라워향은 바로 이곳의 포도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놀라운 것은 4개 빈티지중 2019년이 가장 숙성이 덜 됐지만 가장 뛰어난 밸런스를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비 그라츠 20년의 역량이 집중된 덕분인데 꼴로레 2019가 앞으로 어떻게 더 맛있게 변해갈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