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와 인권

황예랑 기자 입력 2022. 1. 1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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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1397호 표지이미지

그날의 기억은 또렷해서, 도무지 잊히지를 않는다. 16년 넘게 흐른 이 순간까지도. 그날 이후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되감아봐서일까. “어디 도청장치 숨기고 있는 거 아니냐?” 거나하게 취한 그는 팔을 뻗더니 내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듯한 시늉을 했다. 불과 2~3분 전에 성희롱(명백한 성희롱에 해당하는 발언과 행동이 있었지만 추잡해질 테니 굳이 옮기지는 않겠다)을 당하고 항의하자, 되레 나를 추궁하며 말했다. 그는 당시 촉망받는 검찰 간부였다. 한겨레신문 법조팀과 두 명의 검사가 만난 자리였다. 다음날 공식적인 사과문을 요구하자, 그 자리에 동석했던 후배 검사가 ‘형사재판에서 문서의 증거능력을 아는 검사가 어떻게 사과문을 쓸 수 있겠냐’고 중재에 나섰다. 결국 그는 나와 법조팀장을 앉혀두고, 매우 두루뭉술하고도 모호한, 사과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별로 반성하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그 뒤로 오랫동안 그는 검찰에서 승승장구하며 승진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을 앞두고는 초대 공수처장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인권친화적 수사기구’. 2021년 1월 출범한 공수처 누리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뜨는 문구다. 인권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수처장이 될 수 있는 거로구나. 내가 그때 성희롱 사건을 공론화했다면, 적어도 반인권적인 공수처장 후보 이름을 보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날 이후로 또 계속 곱씹었다. 그래서 잊고 싶어도, 도무지 그날의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공수처는 성찰적 권한을 행사한다면, 인권친화적인 국가기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국민 여러분의 마음과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2021년 1월21일 김진욱 초대 공수처장이 취임식에서 한 말이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도 “(공수처가) 인권친화적 수사기구가 되는 데 초석을 놓으면 검찰의 잘못된 수사 관행도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수처 출범 뒤 지난 1년 동안 ‘인권친화’라고 할 만한 수사 기억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다. 오히려 공수처는 검찰의 구시대적인 수사 방식만 답습하거나, 수사 전문성 없이 좌충우돌하는 모습만 보였다. 뚜렷한 수사 성과도 찾기 어렵다. 최근 논란이 된 공수처의 통신자료(가입자 개인정보) 조회만 해도 그렇다. 시민사회단체와 국가인권위원회는 오랫동안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통신자료 조회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문제제기를 해왔다. 하지만 공수처 역시 검찰과 마찬가지로 정치인, 기자, 심지어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통신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한겨레21> 고한솔 기자의 통신자료도 두 차례 공수처의 조회 대상이 됐다. 2022년 1월6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수사기관에 통신자료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인권침해를 최소화하도록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하라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비대한 검찰 권력 견제, 고위공직자에 대한 엄정한 수사 등 공수처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다만 아직 그 기대에 못 미칠 뿐이다. 고한솔 기자가 공수처 출범 1년을 냉정하게 돌아본 이유다. 신지민 기자는 검경수사권 조정 1년을 짚었다.

이번호에서는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이후 이야기도 이어간다. 폭력을 겪었지만 살아남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달라고, 사연을 남겨달라고 열어둔 특별 웹페이지(speakup.hani.co.kr)에 한 달여간 약 160건의 사연이 모였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일부러 꺼내어 기록해준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이들의 사연과 더불어, 10대 청소년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어떻게 남성한테 살해당했는지를 짧은 애니메이션 클립과 그래픽 등으로 재구성한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도 최종 완성한 모습으로 1월20일 공개한다. #페미사이드21 #한겨레21 #femicide21 해시태그를 붙여서, 다시 한번 이 특별 웹페이지를 공유하기를 부탁드린다. 앞으로도 여러분이 내밀어주신 그 연대의 마음, 잊지 않겠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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