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시대'의 도래, 우린 '포퓰리스트'들의 타겟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2022. 1. 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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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books]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서어리 기자(naeori@pressian.com)]
"나 이렇겐 못 살 것 같아. 너무 외로워."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듯 동거인이 나를 쳐다본다. '내가 뭘 섭섭하게 했어?' 하는 잔뜩 억울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게 2년 넘게 지속된 결혼 생활은 안온했고, 특별히 부족함이 없었다. 그건 맞지만...그래도 나는 외롭다.

결혼 후 2년, 나를 외롭게 만든 것은 이웃의 부재였다. 코로나 시국 속에 이사 온 후 간식을 돌리고 편지를 보내도 이렇다 할 교류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들의 탓은 아니었다. 대부분 어린아이 있는 가정이라, 외부인과의 접촉이 두려웠을 터다. 그저 "예전이 그립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혼잣말만 반복할 수밖에.

결혼 전 혼자 살던 아파트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주민 전체가 몽땅 집이 넘어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주민들끼리 똘똘 뭉치게 되면서 우리는 뜻하지 않게 친해졌다. 위기가 만들어준 인연이었달까. 해외 출장을 다녀와 오랫동안 한식을 못 먹었을 때, 몸이 아팠을 때, 그때 이웃은 나에게 뜨끈한 밥과 죽을 나누어주었다. 맛있는 차(茶)를 선물 받았다며, 좋은 책을 샀다며,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음식을 나누고, 온정을 나누었다.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함께였기에 외롭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매일 모르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그래서 숨 막히는 어색함을 견딜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전보다 더 높은 아파트에서, 더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거주하고 있지만, 정작 더불어 살고 있지는 않은 지금이 못 견디게 외롭다. 고립감이 나를 좀먹는 것 같다.

▲<고립의 시대>(웅진지식하우스, 2021년 11월 펴냄) 

치즈버거 주문하듯 친구를 구매하다

쓸쓸함을 안고 사는 우리. 이는 코로나 시대의 풍경, 아니 사실은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흔한 도시의 풍경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쓸쓸함은 꽤 낭만적인 소재로 쓰인다. 그러나 사회학에서 보는 쓸쓸함, 외로움, 고립감이란 낭만이라기엔 위험한 좀비 바이러스다.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는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고립과 외로움의 치명적인 부작용을 설명한다. 노리나 허츠는 저명한 경제학자이지만, 가디언이 선정한 '영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만큼 통섭적 관점에서 세상을 조망한단 점에서 이 책은 경제학보단 사회학 도서에 가깝다.

고립의 시대상을 그려내는 책이라니, 벌써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연말이면 방송에 돌림노래처럼 나오던 '독거노인' 사례들만 줄줄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만만하게 볼 책이 아니다. "헐"이 터져 나오는 사례들과 통계들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 테니까.

외로움에 지친 이들의 대처법 하나, 친구를 '임대'한다. '뭐하러 친구를 돈 주고 사?' 반문한다면 안도의 한숨을 쉬어도 좋다. 여러분의 외로움은 아직 경미한 수준이라는 방증일 테니. 하지만 오로지 취업, 승진만을 바라보고 달려오느라 장시간 업무에 시달린 이들에겐 우정을 경험할 시간조차 없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들은 치즈버거를 주문하듯 친구를 임대하는 것이다. 저자도 '렌트 어 프렌드'라는 회사를 통해 시간당 40달러의 대가를 지불하고 '브리트니'라는 이름의 친구를 고용한 일화를 소개한다. '렌트 어 프렌드'에는 친구로 고용되려는 이들이 무려 62만 명 넘게 대기 중이었다.

조금 더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의 얘기다. 일본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65세 이상 노령층의 범죄 건수가 4배로 증가했다. 그 가운데 여성 재소자들 중 상당수가 소소한 절도 행위를 저질러 스스로 감옥행을 택했다. 고립감을 견디다 못해 저지른 선택이었다. 어느 80대 재소자는 감옥을 "항상 주변에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은 곳"이라 말하고, 동료인 78세 재소자는 "오아시스"라고 표현한다.

ⓒFlickr

외로움이라는 병

실로 충격적인 이들 사례를 보며, 어쩌면 연민보다도 한심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외로움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초래한다. 부정적 감정을 넘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낳는다. 우정을 돈으로 매매하고,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는 이들의 행위가 실은 살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며 본능적인 방어 행동인 셈이다.

저자가 인용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외로움은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우리 몸에 해를 끼쳤고, 알코올의존증과는 비슷한 수준으로, 비만보다는 2배나 더 우리 몸에 해로운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담배를 매일 15개비씩 피우는 것만큼이나 해롭다.

심각한 질병에도 취약해서 관상동맥질환에 걸릴 확률은 29%, 뇌졸중에 걸릴 확률은 32%, 임상적 치매로 진단될 확률은 64% 높다. 외롭다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고 느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조기 사망의 위험이 거의 30%나 높다는 것이다.

"외롭다"고 노래를 부르는 나를 보면서도 동거인은 별스럽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들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면 필시 생각이 달라지리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히틀러, 트럼프를 불러낸 그 다음엔?

외로움이 오롯이 건강상 문제로 국한된다면 그것은 '위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로움이 전 공동체의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위기'다. 그리고 지금 세상은 '위기'의 시대다. 저자는 "외로움 위기는 병원에서뿐만 아니라 투표소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역사상 히틀러와 트럼프라는 걸출한(?) 포퓰리스트가 탄생한 배경에도 바로 '외로움 위기'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덜 연결되어 있을수록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고, 차이를 적절히 조율하고 서로를 시민답게 협력적으로 대하는 연습이 부족해지며, 동료 시민을 좀처럼 신뢰하지 못하고, 그 결과 포퓰리스트가 제시하는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형태의 공동체에 매력을 느낀다."

"주변화되고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사람 앞에 그를 바라봐주고 그에게 귀 기울여주겠다고 약속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어찌 매혹적이지 않겠는가."

결국 외로움, 고립감에 허덕이는 이들은 포퓰리스트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2022년 한국의 상황을 대입해보자.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의 표적이 된 것은 '이대남(20대 남성)'이다. 각종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를 휘어잡고 있는 일부 누리꾼은 '이대남'이라는 허상을 빚어냈고, 그간 "주변화되고 무시당하던" 경험을 집단적 분노로 표출해낸다고 정치가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거대 양당 대선 후보가 경쟁하듯 '외로움을 달래주겠다'며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저자는 "우리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시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한국의 대선 후보들의 눈에는 '이대남'밖에 들어오지 않는 듯하다. '이대남'이란 기표가 정말 거대한 단일 객체로서 실재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느 당 후보는 단 일곱자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내놓고는 "더는 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관련기사 : 논리도 토론도 근거도 없다…윤석열의 무책임한 '일곱 글자') 이른바 이대남의 "주변화되고 무시당하던" 경험이 오롯이 여가부 때문인지에 대한 진지한 분석은 없다. 이대남은 그 당 대표가 얘기하듯 "우리(당)를 위해서 (지난 선거에서) 많은 자료를 만들어주고 방어해주고 '온라인 여론전'을 펼치던 젊은 세대"이기에, 그러니까 이번 선거의 제일 '큰 손'이기에(혹은 '큰 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며 내달린다. 주장에 살을 보태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일단 질러놓고 보는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저자는 포퓰리스트의 전략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신 탓할 수 있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증명된 필승 전략이다. (중략)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감정이 이성과 복잡성을 이기며 두려움이 강력한 도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들은 타자를 적으로 만드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이 사실을 악용한다."

외로움은 바다 건너 영국, 일본 만의 일이 아니었다. 2022년 한국 사회는 포퓰리스트를 정치 지도자로 맞이할 위기를 맞았다. 외로움 위기가 초래한 또 다른 위기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페이스북 갈무리

친절이 우리를 구원한다

포퓰리스트의 출연은 필연적이다. 우리에게는 "지역 모임에 가입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공동체를 이끌거나 단순히 참여하고, 친목을 다지는 과정에서 포용적 민주주의를 연습할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단지 함께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적절히 조율하고 조화시킬 방법"을 배울 곳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명 외로움 위기는 구조적인 문제다. 그러나 억울하게도, 저자는 고립의 시대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모두의 노력, 특히 개인의 노력을 강조한다.

"외로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역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사회를 다시 연결하는 일은 정부, 기관, 대기업이 주도하는 하향식 접근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비록 사회를 광범위하게 단절시키는 과정은 하향식이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역할,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우리가 마을 식료품점에서 만난 이웃 주민과 잠시 근황을 나누고, 마을 바리스타에게서 커피를 받아들며 '잘 지내시죠'라고 인사말을 교환하고, 우리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는 마을 세탁소 주인에게 미소를 짓는 순간 따뜻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우리와 같은 도로에 사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때 벽은 허물어지고 이방인이 이웃이 되며 공동체가 선다.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 더 많이 이바지할수록 더 많이 공동체에 소속되며 더 진정한 공동체를 느끼게 된다."

그럼 곧바로 반문이 튀어나올 것이다.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도 괜찮단 말인가?" 자본 때문에 꾸며진 친절과 웃음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웃는 낯으로 나를 맞이하는 저 점원이 속으로는 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저자는 그러나 심지어 '지침화된 친절' 또한 높이 평가한다. 수많은 연구에서 피실험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진짜 미소와 가짜 미소를 구분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묻따' 친절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을 친근하게 대하거나 남이 우리를 친근하게 대할 때 그 행위가 진정성이 있든 아니면 아주 짧은 순간 연출된 것이든 우리는 우리가 공통으로 지닌 것, 즉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애를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는 혼자라는 느낌이 덜 든다."

물론, 갑질 당하는 부당한 상황에서까지 웃음을 지을 필욘 없다. 그것은 친절의 올바른 용례가 아닐 것이다. 그저 마음이 허용하는 한 노력해보는 거다. 편의점 직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직장 동료의 푸념을 들어주고, 경비원분들께 간식을 나눠드려 보자. 가능하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보는 건 어떤가. 보다 넓은 연결을 위한 노력. 특히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 대화해보기. 이것은 어쩌면 대단한 도전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이 될 수 있다.

독일 언론 <디 차이트>가 '정치적 틴더(소개팅)' 프로젝트를 통해 정치적 관점이 다른 이들끼리 대화하도록 매칭한 후 얻어낸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디 차이트>는 이 프로젝트 후 진행한 설문조사를 통해 단 두 시간의 대화만으로도 참가자들이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편견을 걷어낼 수 있었으며, 서로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됐다는 결과를 얻었다.

당신은 외로운가? 그렇다면 여러분의 건강은 나빠지고, 포퓰리스트의 타겟이 되기 쉽다. 그걸 원치 않는다면 연결되어보자. <프레시안> 조합원 활동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조합원 모임에서 우리는 함께 대화하고, 그러다 다투고, 그러나 화해하고 다시 어울렸던 경험이 있다. 노리나 허츠가 말한 '포용적 민주주의'를 배우는 공동체의 경험이 바로 그것 아닐까. 코로나가 조금 물러가거든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함께'만이 이 지독하게 외로운 '고립의 시대'를 극복하는 방법이니까.

"지금은 외로운 세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미래는 우리의 손 안에 있다."

[서어리 기자(naeor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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