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박현 2022. 1. 1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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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썰]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한겨레TV>

안녕하십니까? <논썰>의 박현입니다.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의 SNS ‘멸공’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타벅스,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등 신세계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불매운동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고 계열사들 주가가 한때 폭락하는 등 크게 출렁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정 부회장의 멸공 발언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등 파문이 정치권으로까지 번졌습니다.

저는 이번 소동을 보면서 미국 테슬라의 일런 머스크 창업자를 떠올렸습니다. 머스크는 시도 때도 없이 트위터에 논란이 되는 글을 올려, 창업자가 기업 경영에 큰 리스크로 떠오르는 이례적인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머스크는 2020년에는 “내 생각에 테슬라 주가가 너무 높다”는 글을 올렸다가 순식간에 주가가 폭락해 시가총액이 17조원 날아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앞서 2018년에는 “테슬라 상장폐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올렸다가 미국 증권규제당국인 증권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았습니다. 당시 증권거래위는 벌금 2천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240억원을 부과하는 한편, 머스크의 이사회 의장 자격을 박탈하고 이사회에 독립적인 이사 2명을 포함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트위터에 글을 올릴 때는 자문 변호사의 승인을 받도록 했습니다.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그렇다면 정용진 부회장의 멸공 발언 파문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멸공 발언의 전말을 시간순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멸공’ 파문, 두달 전 ‘난 공산당이 싫어요’에서 단초

정 부회장의 멸공 관련 글은 지난해 11월15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yj―loves’라 아이디를 사용하는 정 부회장은 인스타그램에 붉은색 지갑과 피자를 손에 들고 있는 사진을 찍어 올리면서,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해시태그를 붙였습니다. 이틀 뒤에는 ‘난 콩이 상당히 싫다'는 글을 또 올렸습니다.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올해 들어서도 멸공 발언은 이어졌습니다. 정 부회장은 1월 6일 ‘한국이 안하무인인 중국에 항의 한 번 못한다'는 제목으로 정부의 대중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신문 기사 캡처 화면을 올렸습니다. 이 기사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이 들어있었습니다.

정 부회장이 이 게시물에 추가 내용은 적지 않았지만 ‘멸공' 해시태그를 함께 올렸습니다. 그가 이 게시물을 올린 것은 최근 인스타그램이 ‘멸공' 태그가 붙은 자신의 게시물을 ‘폭력·선동'이라며 삭제한 데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인스타그램은 ‘시스템 오류'라며 삭제된 게시물을 하루 만에 복구했지만, 정 부회장은 새로 올린 게시물에 ‘이것도 지워라', '이것도 폭력선동'이냐는 태그를 함께 달아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정 부회장의 글에 시진핑 주석의 사진이 실리면서, 이것이 신세계는 물론 중국 시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국내 많은 기업들에 부담을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9일엔 그가 대상으로 하는 건 중국이 아니라 북한이라고 해명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나의 멸공은 오로지 우리 위에 사는 애들에 대한 멸공입니다. 나랑 중국이랑 연결시키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윤석열·나경원·김진태 등 가세…박노자 “바보들의 행진”

논란은 정치권이 가세하면서 커졌습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8일 이마트에서 멸치와 콩을 사며 그를 응원하는 모습을 연출한 겁니다. 이후 윤 후보 개인 인스타그램에는 장보는 사진과 함께 해시태그로 ‘#달걀 #파 #멸치 #콩’이라고 적은 글이 올라왔습니다. ‘AI 윤석열’은 ‘이마트에서 장을 잘 봤느냐’는 질문을 받고 “장보기에는 좀 진심인 편”이라며 “오늘은 달걀, 파, 멸치, 콩을 샀습니다. 달파멸콩”이라고 했습니다. ‘멸공’에 달파까지 더해졌는데, 달파를 두고 문재인 대통령의 문을 뜻하는 ‘달’과 깨뜨릴 ‘파’를 합쳐 문재인 정부를 타파하자는 의미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이어 나경원 전 의원, 최재형 전 감사원장, 김진태 전 의원 등도 이에 가세했습니다.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그러자 여권에선 정용진 부회장의 ‘오너 리스크’를 지적하고 국민의힘이 ‘철지난 색깔론’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9일 트위터에 글을 올려 “국힘 대선 후보와 정치인들의 ‘달-파-멸-콩’ 일베 놀이. 뿌리가 어디인지 보여준다”고 지적했습니다. 박영선 민주당 선대위 디지털대전환위원장은 12일 정 부회장을 겨냥해 “멸공에서 멸한 사람이 누구냐. 자기 자신”이라며 “신세계 주가가 엄청 떨어졌다. 제가 알기에는 2천억원 이상이 날아갔다. 오너 리스크, 기업 리스크로 돌아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태년 전 민주당 원내대표도 정 부회장을 향해 “신세계는 앞으로 중국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본인의 그런 한 마디가 중국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 기업과 종사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정 부회장의 멸공 발언을 두고 온라인상에서도 찬반 여론이 갈라졌습니다. 한편에선, ‘보이콧 정용진,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는 포스터가 커뮤니티 누리집에 공유되면서 스타벅스,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등 계열사들에 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졌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정 부회장에 대한 응원과 함께 스타벅스 구매운동도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은 신세계그룹 주가 급락으로 이어졌습니다. 10일 코스피 시장에서 신세계 주가는 전일 대비 6.8%나 하락했습니다. 신세계인터내셔날도 5.34%나 떨어졌습니다. 신세계 주주들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정치적 발언으로 발생한 사주 리스크”라며 “대기업 사주로서 기업 경영과 무관한 정치적 발언은 기업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니 중단해달라”고 호소하고 나섰습니다.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하루 뒤인 11일 논란이 더 확산되자 정 부회장은 멸공 관련 일부 게시물을 삭제하며 사태 수습에 나서는 듯했습니다. 그는 이날 오전 일찍 인스타그램에 ‘NO 보이콧 정용진,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올렸습니다. 게시물에는 “업무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을 적었습니다. 회사 쪽에선 정 부회장이 멸공 발언을 자제할 것이라는 얘기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이어 북한이 동해상으로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기사를 올리면서 ‘OO’이라고 썼습니다. 논란을 의식해 멸공이란 단어 대신 ‘OO’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멸공 발언 자제 약속이 진정성이 없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정 부회장은 북한 미사일 기사 관련 게시글을 2시간여 만에 삭제했습니다. 불매운동 포스터 게시물에 달린 글은 “누가 업무에 참고하란다”로 교체했습니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더는 멸공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오해되는 문구를 수정하고 미사일 게시물도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 부회장은 자신의 이런 SNS 활동이 혹시 정계 진출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을 의식해서인지 이와 관련한 글도 올렸습니다. 그는 “사업하는 집에 태어나 사업가로 살다 죽을 것이다. 진로 고민 없으니까 정치 운운 마시라”라고 했습니다. 또 정치권이 자신의 발언을 이용한 데 대해서도 충고를 했습니다. “사업가는 사업을 하고, 정치인은 정치를 하면 된다. 나는 사업가로서, 그리고 내가 사는 나라에 언제 미사일이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한 매일을 맞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느끼는 당연한 마음을 얘기한 거다. 내 일상의 언어가 정치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까지 계산하는 감, 내 갓끈을 어디서 매야 하는지 눈치 빠르게 알아야 하는 센스가 사업가의 자질이라면... 함양할 것이다.”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이번 소동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재벌 총수와 보수야당 정치인들이 ‘멸공’이라는 철지난 색깔론에 열을 올리는 건 정말로 시대착오적입니다. 박노자 교수는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말이 이럴 때에 쓰이는 것이겠죠? 한국 기업,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에 가장 큰 위협 중의 하나는 재벌 왕조 상속자들의 의식/지능 수준, 그리고 사법계 일각의 정신 상태입니다...”

[논썰] 정용진의 ‘멸공 리스크’, 이사회는 뭐 하고 있었나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듭니다. 새해 벽두에 새로운 사업 구상하랴, 지난해 사업 마무리하랴, 임직원들 사기 북돋으랴 한참 바쁠 시기에 대기업 CEO가 이렇게 SNS에 몰입하고 있을 시간이 있을까요? 저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정용진, ‘멸공’ SNS 릴레이 왜 했을까?

정용진 부회장이 통신조회를 당한 점이 최근 행보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정 부회장은 7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통신자료 조회를 당한 사실을 알리면서 자신에 대한 통신자료 제공 내역 확인서를 공개했습니다. 해당 확인서에 따르면, KT는 지난해 6월9일 서울중앙지검의 요청을 받고 정 부회장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가입일, 해지일 등의 내역을 제공했습니다. 또 KT는 지난해 11월8일 인천지검의 요청에 따라 같은 내역을 제출했습니다. 정 부회장은 올해 1월5일 KT에 통신자료 조회 여부를 문의해 이런 내역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5일은 정 부회장이 자신의 멸공 관련 인스타그램 글이 ‘폭력·선동' 등의 이유로 삭제됐다고 반발한 당일입니다. 정 부회장은 이날 통신조회 확인서와 함께 올린 글에서 “진행 중인 재판 없고, 형의 집행 없고, 별다른 수사 중인 건이 없다면 국가 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해 내 통신 내역을 털었다는 얘긴데…”라고 적었습니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은 수사기관들이 수사에 필요할 경우 통신사업자에게 통신자료 제공을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통신자료 조회는 개인정보 자기결정권과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수십년간 되풀이돼온 통신자료 조회 남용은 이제 없어져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이 정 부회장의 최근 행보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 부회장의 관련 글은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나왔으니까요. 또한 통신자료 조회가 멸공이나 중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정 부회장의 속마음까지 제가 정확히 알겠습니까만, 몇가지 추론은 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왜 이 시기에 ‘멸공’이란 발언을 꺼냈냐는 겁니다. 정국의 향배에 누구보다도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재벌 총수인 정 부회장이 대선을 코앞에 두고 ‘멸공’이란 단어가 어떤 파장을 낳을지 몰랐을 리는 없을 겁니다. 결과론적으로 봐도 야당 후보가 이걸 선거운동에 활용했습니다. 이걸 정 부회장이 노린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는 11일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일상의 언어가 정치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까지 계산하는 감, 내 갓끈을 어디서 매야 하는지 눈치 빠르게 알아야 하는 센스가 사업가의 자질이라면... 함양할 것이다” 앞서 9일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트위터 글(국힘 대선 후보의 정치인들의 달파멸콩 일베 놀이. 뿌리가 어디인지 보여준다)을 띄우면서 “이분 진짜 #리스팩”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글들을 보면 정 부회장의 진심이 무엇이었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두번째는,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얘기입니다. 신세계그룹은 2011년 이마트와 신세계로 계열 분할을 하고, 이어 2016년에는 정 부회장과 동생인 정유경 총괄사장이 각자 보유한 신세계와 이마트 주식을 맞교환했습니다. 지분 맞교환으로 정 부회장은 이마트, 정 총괄사장은 신세계의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어머니 이명희 회장이 보유한 주식 일부를 두 남매에게 증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 부회장은 이마트 지분 18.56%, 정 사장은 신세계 지분 18.56%를 보유해 각각 최대주주가 됐습니다.

당시 신세계그룹은 “책임경영 강화 차원”이라는 설명을 내놨습니다. 두 남매가 각각 이마트와 신세계를 책임지고 경영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이번 소동이 가장 크게 논란이 된 10일 주가가 타격을 입은 회사는 어느 쪽일까요? 상식적으로 본다면 정 부회장이 책임지는 이마트 주가가 타격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마트 주가는 오히려 올랐습니다. 반면에 신세계 주가가 빠졌습니다. 이마트는 중국 사업이 별로 없고, 신세계는 화장품, 면세점 등 중국 관련 사업이 많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정 부회장은 왜 자신의 멸공 글에 시진핑 주석이 들어간 사진을 첨부했을까요? 그는 나중에 사진에 시진핑 주석이 들어 있는 걸 몰랐다고 해명했습니다. “내가 조선일보의 기사를 캡쳐하면서 중국의 지도자 얼굴이 살짝 비친 포스팅은(사실 그 포스팅에 얼굴이 들어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대한민국을 소국으로 칭한 것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반감 때문에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정 부회장 게시글에 올린 기사에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고 이 사진에 들어있는 사람은 시진핑 주석뿐이었기 때문에 “시진핑 주석이 사진에 들어있는 걸 몰랐다”는 정 부회장의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다행히 신세계 주가가 11일부터는 다시 반등을 시작해 하락 폭을 만회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 부회장의 이번 포스팅이 신세계의 중국 관련 사업 리스크를 키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세번째는, 이마트의 중국 철수에 따른 앙금입니다. 이마트는 1997년 중국에 진출했으나 실적이 부진해 2017년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저도 이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현지 이마트를 가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이마트처럼 규모가 컸습니다. 정 부회장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이마트의 현지화에 진력했다고 합니다. 한때 매장이 30개에 육박했습니다. 중국의 사드 배치 보복이 사업 철수의 결정타라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사드 논란이 있기 전부터 이마트는 이미 철수를 하고 있었으니 좀 다른 얘기인 것 같습니다. 현지에서 인지도 올리기에 실패해 적자가 누적된데다 개선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철수했다고 보는 게 일리 있는 분석입니다.

정용진, 한때 ‘SNS 셀럽’에서 이젠 ‘오너 리스크’

사실 정용진 부회장은 재벌 총수로는 드물게 10여년 전부터 SNS 셀럽으로 불릴 정도로 SNS 활동을 활발하게 해왔습니다. 이마트 경영을 사실상 책임진 2010년에는 트위터에서 고객 불만과 건의 사항을 직접 접수하고 응대했습니다. 마트의 과일이 어떻고, 가격이 어떻고, 냉방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시시콜콜 적었습니다. 요리하는 모습이라든가 반려견과의 일상 등도 공개했습니다. 재벌 오너 출신 중에 이렇게 고객들과 소통하는 경영인은 매우 드문 사례입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신세계가 젊은 기업 이미지를 가지게 하는 데 일정 정도 기여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정 부회장의 SNS 활동이 아슬아슬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는 2010년 트위터에서 기업형 슈퍼마켓(SSM)과 이마트 피자 등을 둘러싸고 문용식 나우콤 대표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2011년에는 20인승 벤츠 미니버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 버스 전용차로를 이용해 출근하는 사실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습니다. 그는 그 사건을 계기로 트위터를 탈퇴해 수년간 SNS 활동을 중단했다가 2015년께부터 인스타그램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동으로 정 부회장의 SNS 활동은 이제 기업의 골칫거리가 됐습니다. 경솔한 SNS 글이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경영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세계 계열사 직원들은 직장인 익명 앱인 ‘블라인드’에서 중국 사업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기업 가치를 올려야 하는 책임을 진 CEO가 오히려 기업 가치를 갉아먹고 있으니 얼마나 불만이 크겠습니까. 한 직원은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회사인데···임직원들의 수고와 노력을 망쳐놨다.” “중국 대상 판매는 이제 접어야죠. 오너 일가 중 한 명이 멸공이라고 했으니 ‘중국인들 썩 꺼져라’라고 선포한 걸로 봅니다.”

노조도 정 부회장에 대해 멸공보다도 본인 사업을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습니다. 전국이마트노동조합은 12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직원들의 노력으로 타사 대비 선방하고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 고객과 국민에게 분란을 일으키고 회사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정 부회장의 언행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노조는 이어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자유이나 그 여파가 수만명의 신세계, 이마트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게도 미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정 부회장도 결국 사과를 했습니다. 정 부회장은 13일 노조의 성명 발표를 전한 기사를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며 “나로 인해 동료와 고객이 한명이라도 발길을 돌린다면 어떤 것도 정당성을 잃는다! 저의 자유로 상처받은 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저의 부족함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재계 순위 11위 그룹의 CEO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닙니다. 기업·임직원·주주는 물론 사회적으로 책임이 있는 공인임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언행이 진중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두달 간 아무 말도 못한 ‘허수아비’ 이사회

정용진 부회장의 이번 멸공 파문과 관련해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독립적인 이사회와 내부통제의 중요성입니다. 정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두달 가까이 멸공 글을 계속 올렸으나 신세계 이사회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 부회장의 SNS 글이 도를 넘기 시작했을 때 이사회가 말렸어야 했습니다. 총수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이사회의 가장 큰 책무입니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재벌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자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당시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가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꼽혔기 때문입니다. 총수 일가가 부채에 의존해 무리하게 문어발식 확장경영을 하며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데도, 이사회는 전혀 제동을 못 걸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기능하고 총수 일가를 감시·견제할 수 있도록 사외이사 의무화를 권고했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사외이사를 모두 대주주에게 우호적인 인사들로 채워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회가 총수의 전횡이나 불법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정당화해주는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나 관료, 법조인들의 용돈벌이용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재벌은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할 때마다 ‘이사회 중심 경영’을 내세우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재벌 개혁’,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

이번 대선을 포함해 최근 재벌 개혁 문제가 관심 밖의 사안이 됐으나 재벌 개혁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재명 후보는 경제 개혁을 위해 공정시장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공정시장위가 발표한 ‘주식시장 개혁 방안’에는 이사가 회사뿐 아니라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직무를 수행한다는 ‘이사 의무 강화 방안’이 포함됐습니다. 또한 상장사의 기업지배구조를 유지·개선하도록 상장 규정에 동태적 적격성 심사를 도입하겠다고 했습니다. 누가 대선에서 이기든 거수기에 그치는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박현 논설위원 hyun21@hani.co.kr

연출·편집 조소영 PD

도움 채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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