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발가락이 닮았다'? 김동인·염상섭의 자존심 건 지상논쟁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2. 1. 1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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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90년 전 조선일보 '모델소설 논쟁'으로 비화
1932년 1월 주요한이 발행하던 월간지 '동광'에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한 김동인. 횡보 염상섭을 모델로 삼았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모델소설논쟁'이 벌어졌다.

1932년 벽두 문화계는 김동인·염상섭의 논쟁으로 시끌벅적했다. 월간지 ‘동광’ 1932년 1월호에 실린 금동(琴童) 김동인(1900~1951)의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가 빌미가 됐다. 횡보(橫步) 염상섭(1897~1963)이 자기를 모델삼아 쓴 소설이라며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총각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갖은 성병까지 걸렸다가 서른 넘어 결혼한 M이 주인공이다. 생식 기능을 잃은 줄 알았던 M은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번민한다. M처럼 서른 넘어 늦장가 가서 아이를 낳은 횡보는 금동이 자신을 욕보였다며 펄펄 뛰었다. 당장 ‘모델보복전’이란 반론을 써서 ‘동광’에 투고했다.

◇스캔들로 떠오른 ‘발가락이 닮았다’

횡보는 잡지가 나오기 직전 원고를 거둬들여 게재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횡보가 반박문을 기고했다는 얘기는 순식간에 퍼졌다. 누군가 금동에게 귀뜸했고, 원고까지 읽었던 모양이다. 좁은 바닥이었다.

‘양력 정월초승께 나는 생명이 위태롭도록 중태인 병상에 누워있을 때에 서울 어떤 친구에게서 ‘네가 동광에 낸 ‘발가락’에 대하여 염상섭군한테서 ‘이것은 나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는 항의 비슷한 반박문이 동광사에 왔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이세상의 무엇보다도 귀중한 나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할 때였으므로 그 말을 중대시하지 않았다.’(‘나의 변명1-발가락이 닮았다’, 조선일보 1932년 2월6일)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종로 출입구에 있는 '횡보 염상섭 상(조각가 김영중 作)'. 횡보는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가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며 분개 , 1932년 2월 조선일보 지면에서 김동인과 '모델'소설논쟁을 펼쳤다.

◇금동, 횡보의 조선일보 紙上논쟁

하지만 문단 주변에서 ‘그게 무슨 짓이냐’는 항의부터 ‘화해를 하라’는 권고가 이어졌다. 김동인은 일이 심상치 않게 됐다고 생각했다. ‘나의 변명-’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하여’(조선일보 2월6일~2월13일·총5회)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작가가 스캔들을 해명하기 위해 집필 과정을 신문 지면을 통해 공개하는, 문학사에 드문 진기한 장면이었다.

염상섭도 맞받았다. 조선일보에 ‘소위 모델 문제’(2월21일~2월26일·총 5회)를 기고했다. 금동과 횡보가 각각 5회씩, 총10회 주고 받은 이 논쟁을 학계에선 ‘모델 소설’ 논쟁이라고 부른다. 1930년대 대표적 작가 둘이 충돌한 이 논쟁은 근대 문학 초창기 문단의 이면을 흥미롭게 들춰낸다. 근대 최초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시인 김억(1896~?·필명 岸曙)도 이 논쟁에 얽혀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염상섭의 ‘질투와 밥’이 발단

염상섭은 1931년 10월 파인 김동환이 내던 월간지 ‘삼천리’에 단편 ‘질투와 밥’을 발표했다. 돈 있는 첩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가 본처에게 곤욕을 치르는 인텔리 S를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김억은 염상섭이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을 발표해 망신을 줬다고 펄펄 뛰었다. 같은 이북 출신인 친구 김동인에게 복수해달라고 매달렸다는 것이다.

김동인은 ‘문학자가 누구의 부탁을 받아서 복수적으로 붓을 잡는다 하는 일은 문학자인 염군의 양심에 물을 뿐 구구히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고 잘랐다. ‘창작은 창작이지 결코 무슨 무기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는 신조를 가지고 아직껏 문(文)에 대하여 뿐은 결벽과 자존심과 신용을 지켜온 나는 한번도 이 신조를 범하여 본 일이 없다.’

◇”두세곳 공통점 있다고 모델인가”

김동인도 ‘발가락’ 주인공 M이 염상섭과 비슷한 곳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서른이 넘도록 가난한 총각으로 있던 점, 연애도 지참금 목적도 아닌 결혼을 한 점을 들었다. 하지만 톨스토이 ‘부활’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젊었을 때 방탕했다거나 뒤돌아보지않는 저돌적 성격이 나(김동인)와 닮았다고 해서 부활이 나를 모델로 쓴 소설이라는 항의를 톨스토이에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두세가지 닮은 곳이 있다고 ‘발가락’ 주인공이 염상섭을 모델로 했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게 김동인의 반박이었다. (이상 ‘나의 변명’2, 조선일보 1932년 2월7일) 금동은 이 글에서 횡보를 모델삼아 쓴 게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대여섯시간만에 쓴 ‘발가락’

김동인은 이 글에서 ‘1931년 11월23일 밤 10시부터 이튿날 새벽4시까지 썼다’(’나의 변명’ 5, 조선일보 1932년 2월13일)고 작품의 ‘출생일시’까지 밝혔다. 밤사이 아내 출산을 기다리면서 썼는데, 다 쓴지 5~6시간뒤 해산을 했다고도 썼다. 속필도 놀랍지만, 아내 출산이 임박한 시점에 이런 작품을 써낸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면서 한해전 여름 ‘동광’에 ‘결혼식’이라는 단편도 발표했는데, 실제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 전 썼다고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떠오른 생각을 작품으로 쓴 것처럼, 출산을 앞두고 소설가로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발가락’이 튀어나왔다는 해명이었다.

조선일보 1932년 2월6일자에 실린 김동인의 '나의 변명1-'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하여'

◇염상섭의 반격

염상섭의 반박도 만만찮았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의견에 대하여 그 의견을 상대로 하고 자기 변명부터 공중에 호소한다는 것은 어떤 영문인지 나는 모른다.’(’소위 ‘모델’문제’1, 조선일보 1932년 2월21일)

이어 ‘모델보복전’이란 글을 쓴 과정과 게재를 보류한 사연을 담았다. 소설 ‘발가락’ 주인공의 서른 넘은 결혼이나 신여성과의 구식결혼, 득남은 자신의 실제 생활과 부합하므로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고 추측했고, 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소설 후반에 나오듯, 자식까지 불륜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악의적인 글이라는 주장이었다.

염상섭은 김억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모델 문제’가 도화선이 됐을 것이라고도 썼다. ‘즉 전자에 내 소설의 모델이 되었다는 모우(某友)의 위촉을 받아서 이번에는 나를 모델로 대변자적 보복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얐든 것이다.’

조선일보 1932년 2월21일자에 실린 염상섭의 '소위 '모델' 문제'. 2월26일까지 모두 5회 실렸다.

◇김억의 삭제 요청

염상섭은 ‘동광’ 기고를 보류한 이유로 친구들의 만류와 함께 김억의 요청도 들었다. ‘나와 모델 문제가 되어있던 모군(某君)이 나의 글을 동광사에서 보았다고 자기에 관한 부분만은 삭제하여 달라고 재삼 요구하는 일이다…모군에 대하야 나는 별로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재삼 간탁하는 것을 무리하게 발표하는 것도 안됐다고 생각하였’(소위 ‘모델’문제2, 조선일보 1932년 2월23)다는 것이다.

◇김동인의 문단사 회고

이로부터 17년이 흐른 뒤 김동인은 ‘발가락’ 사건을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1949년 월간 ‘신천지’에 실은 ‘문단 30년의 발자취’(8)에서다. 김동인은 김억과 함께 염상섭의 아현동 신혼집을 다녀간 얘기를 쓴 뒤, 어느날 김억이 매우 흥분해서 부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안서(김억 필명)를 주인공으로 한 무슨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분하여 못 견디겠으니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었다…안서는 정거장까지 따라 나와서 꼭 복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김동인은 이렇게 썼다. ‘그것이 안서의 부탁으로 써진 것인지는 나는 모른다. 더구나 염상섭을 모델로 한 것인지는 모르는 바이다.’ 17년 전 ‘나의 변명’때보다는 후퇴한 듯 보인다. 김억의 부탁이 있었던 사실과 그 부탁이 은연 중에 반영됐을 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긴 게 그렇다. 이북 동향이자 문예지 ‘창조’ 동인을 함께 한 김억과 김동인은 절친이었다.

◇조용만의 후일담

1930~1940년대 소설가 겸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였던 조용만(1909~1995)의 회고는 관찰자의 시각에서 당시 문단이 이 사건을 어떻게 봤는지 보여준다. ‘횡보는 한 때 안서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 때 안서는 여인 관계로 문제가 있었다. 횡보는 장난으로 이것을 모델로 해 단편을 썼는데 안서는 이것을 읽고 펄펄 뛰어서 동인한테 횡보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졸라댔다. 동인은 그래라 하고 역시 장난으로 ‘발가락이 닮았다’는 단편을 썼다.’

이 사건 때문에 횡보가 대노해 동인과 절교를 선언하고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지 몇 해 뒤에 우연히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나 동인이 먼저 껄걸 웃으니까 횡보도 껄걸 웃고 말았다는 후문이 있었다.’(이상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161~162쪽) 문단 라이벌간의 경쟁이 빚은 문학사의 해프닝이었다.

◇참고자료

김동인, 나의 변명, 조선일보 1932년 2월6일~13일(5회)

염상섭, 소위 모델논쟁, 조선일보 1932년 2월21일~26일(5회)

염상섭, 질투와 밥, 삼천리 1931년 10월

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 동광 1932년 1월,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범양사, 1988

김동인, 문단30년사, 김동인전집 6, 삼중당,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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