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맵고 알싸한 이 음식의 참맛, 어른이 돼서야 비로소 알았네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입력 2022. 1. 15. 03:04 수정 2022. 1. 15.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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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의 Pick] 양장피
서울 공릉동 '광성반점'의 양장피./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양장피를 처음 본 건 수원 고모집에서였다. 방학마다 수원에 놀러 가면 동생과 나는 ‘이번에는 뭘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날은 고모부가 동네에서 알아준다는 중국집에 주문을 넣었다. 짜장면 곱빼기로 시작된 목록 끝에 ‘양장피’라는 이름이 나왔다. 동생과 내가 세수라도 하듯 짜장면 그릇에 머리를 박았을 때, 고모부는 충청도 사람 특유의 느릿한 동작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 맨 밑 칸 초록색 병 뚜껑을 “드르륵” 소리 내며 땄다. 고모부는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미소를 크게 지으며 초록 병 한 잔, 양장피 한 젓가락을 오갔다. 잠시 고모부가 한마디 했다.

“너희도 좀 먹지 그랴.”

고모부가 먹는 모습을 보니 그 양장피를 나눠 먹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샐러드 비슷한 양장피는 겨자의 알싸한 맛이 코를 찔렀다. 인상을 잔뜩 쓰니 고모부가 “허허허” 하며 웃더니 “너희가 먹기엔 좀 강하지?”라며 또 한 잔을 마셨다. 그 모습은 어른만 느낄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기쁨 같았다.

그 기쁨을 찾아 서울에서 양장피 잘하는 집을 찾자면 우선 1972년 문을 연 대림동 ‘동해반점’에 가야 한다. 단독 3층 건물 외관은 타일로 덮였고 간판의 글자체는 고풍스러웠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일타 강사 강의실에 들어온 것처럼 사람들이 좌석 빼곡히 앉아 바쁘게 식사하고 있었다. 고기와 양배추 등을 다져 넣은 유니짜장은 순둥이 친구처럼 맛이 유하고 부드러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집 특징 중 하나가 짜장밥을 시켜도 짬뽕밥을 시켜도 맨밥이 나오지 않고 볶음밥이 나온다는 것이다. 덕분에 식사 주문이 특히 많다.

그럼에도 대표 메뉴는 역시 양장피다. 곱게 칼질한 채소가 주변을 호위 무사처럼 두르고 가운데 볶은 고기, 양배추가 수북이 올라간 양장피는 차가운 음식과 더운 음식 사이에 있었다. 겨자를 적당히 붓고 채소와 전분으로 만든 투명한 피를 국자 두 개로 뒤섞었다. 돼지고기, 새우, 오징어, 각종 채소가 알싸한 맛에 하나로 뭉쳐 서걱서걱 씹혔다. 공손한 모습이 몸의 일부가 된 듯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나이 든 주인장처럼 변하지 않는 맛이 재료 하나하나에 서렸다.

강변북로를 타고 쭉 돌아 성수동에 가면 ‘장가’라는 곳이 있다. 주방을 지키는 요리사 두 명의 팔뚝과 어깨를 보면 가게 이름이 ‘장가’가 아니라 ‘장비와 여포’ 정도 될 법하다. 그 풍채에 부끄럽지 않게 음식은 늘 주문이 들어오면 만들기 시작한다. 고기가 주방장 팔뚝처럼 굵은 탕수육은 누구 하나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과하게 튀기지 않아 고기는 촉촉했고 갈색 소스는 묵직한 단맛과 상큼한 신맛이 술래잡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뤘다. 짜장과 짬뽕 모두 옅거나 가벼운 느낌 하나 없이 정권(正拳)을 후려치듯 묵직하게 툭툭 혀를 내려찍는 맛에 이 집 개성의 축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가늠이 잡혔다.

이 집 양장피는 더운 음식에 가까웠다. 짜장 색에 가깝게 짙은 색으로 볶은 고기와 채소가 중간에 자리를 잡아 그 맛을 이끌었다. 겨자는 그 소스에 녹아들어 목구멍으로 넘어갈 즈음 채찍 같은 아릿한 맛을 냈다. 재료를 보면 모두 칼질과 선도가 예리했다. 주방을 지키는 이들의 자부심도 근육 못지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강북으로 올라가 공릉동에 가면 ‘광성반점’이 있다. 본래 저녁 6시쯤 문 열어 새벽까지 영업하던 이곳은 요즘 영업 규제로 시작 시간이 오후 3시경으로 바뀌었다. 주인장 혼자 주방을 지키기에 영업 여부를 전화로 확인하는 편이 좋다.

대양을 넘나든 마도로스였다고 해도 믿을 법한 단단한 체구의 주인장은 등대를 지키듯 홀로 끼니를 챙기는 이들을 조용히 거둔다. 어두운 도로에 혼자 불을 켜고 영업한다고 하여 음식에 변명이 섞이는 법은 없다. 중화 냄비 웍에서 그대로 건져낸 간짜장은 면 다발에 그 열기가 그대로 배었다. 뜨거운 맛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듯 뿜어져 나오기에 쉬엄쉬엄 식사할 틈이 없었다. 붉은 국물 흥건히 볶아낸 잡채밥, 해산물과 채소가 수북한 삼선볶음밥 모두 인기 메뉴다.

동행이 있다면 양장피가 테이블 가운데 놓이는 경우가 많다. 바로 부쳐낸 달걀 지단, 당근, 오이, 오징어 같은 것이 수북하고 매콤하게 볶아낸 채소가 가운데 올라갔다. ‘매워야 맛이지!’라며 겨자를 호탕하게 붓고 대충 비빈 뒤 젓가락질을 하면 지쳤던 몸과 마음에 힘이 돌았다. 입 여는 것조차 피곤한 한밤이라도 조금씩 말이 새어 나오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한 가닥씩 뽑아냈다.

이 맛이었으리라. 세상은 단맛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대신 맵고 알싸한 맛이 뒤섞여 어지럽게 이리저리 치였다. 거짓말 같은 단맛이 아니라 통증같이 아린 맛도 입에 맞는 날이 찾아왔다. 고모부가 맛보았던 세상도 그랬을 것이다. 양장피 한 젓가락에 혼자 웃고 마는 그 맛을 이제 나도 알아간다.

#동해반점: 유니짜장 6500원, 삼선볶음밥 8500원, 양장피 2만5000원(소). (02)832-4430

#장가: 탕수육 2만1000원(중), 양장피 3만5000원. (02)2117-0202

#광성반점: 간짜장 5500원, 양장피 2만9000원. (02)976-0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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