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렸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입력 2022. 1. 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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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가 다니던 여고에는 ‘1111 금지법’이 있었다. 브래지어 위에 끈 형태가 아닌 ‘메리야스’로 불리는 민소매 속옷을 입어야 했다. 브래지어와 끈 형태 민소매 속옷을 함께 입으면 교복에 비친 속옷이 ‘1111’ 형태로 보인다 하여 1111 금지법이라 불렀다. 걸린 학생들은 ‘속옷도 제대로 안 챙겨 입는 날라리’ 취급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남성 교사가 등짝을 때리거나 브래지어 끈을 튕기면서 면박을 주며 성희롱하는 걸 참아야 했다. 당시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그때 수치심을 꿀꺽 삼키는 대신 분노하며 항의했더라면 어땠을까?

오수경 자유기고가

‘군인 아저씨’에게 위문편지 쓰는 일도 했다. 선생님은 군인 아저씨들이 나라를 지키는 덕분에 우리가 평안하게 사는 것이라며 감사하는 마음을 편지에 담으라고 했다. ‘행운의 편지’ 흉내 내며 장난처럼 쓰는 친구가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귀찮아하면서도 제법 정성들여 편지를 썼다. 어떤 학생에게는 군인 아저씨가 꽃다발을 들고 학교 앞으로 찾아온 일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이걸 왜 써야 하나요’라고 질문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모 여고 학생이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군 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관행에 반발하여 조롱하듯 쓴 편지로 논란이 한창이다. 편지 내용이 담긴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되자 해당 학교 학생들이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의 표적이 되는 등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논란이 일자 학교 측은 “1961년부터 시작해 해마다 이어져 오는 행사”임을 강조하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국군 장병 위문의 다양한 방안을 계속 강구하고 있다”는 취지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시대착오적 관행을 재검토하겠다거나, 위협적 상황에 놓인 학생들을 어떻게 보호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학교 측의 사과에는 그 편지를 쓴 학생을 향한 나무람이 은근하게 깔려 있는 것도 같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과연 변화하는 시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편지 내용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이들의 ‘편지 시위’로 우리는 낡은 관행의 적절성을 따져볼 수 있게 되었고, 잘못된 관행이라면 바꾸거나 폐기하자는 논의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위문편지를 자발적으로 쓴다면 문제가 아니다. ‘여학생’들에게만 성인 남성인 군인에게 편지를 쓰도록 강제하는 게 잘못이다. 비자발적으로 휘갈겨 쓴 편지가 군인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 ‘위안부’ 등 남성 사회가 여성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동원하고 활용했는지 유구한 역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런 관행은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린 것이다.

‘편지 시위’를 한 학교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인 나혜석의 모교이며, 남성 교사의 성희롱을 폭로한 ‘스쿨 미투’가 일어난 곳이다. 즉 이번 사건은 돌발 사고가 아닌 변화하는 시대를 가늠할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어떤 이들은 ‘요즘 애들’을 걱정하겠으나,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요즘 애들이 반갑고 고맙다. 사회가 어떤 면에서는 퇴행하고 있다고 절망하는 순간에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명여고 학생들을 응원한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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