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 내려앉은 동물원 옆 미술관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시사저널=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은 모두 네 곳이다. 서울관, 과천관, 덕수궁관, 그리고 청주관이 있다. 서울관이 당연히 메인 전시관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본관은 1986년에 개관한 과천관이다. 하지만 2013년 서울관이 생기면서 지금은 '본관'이 어디고 '분관'이 어딘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1998년에 개봉했던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제목처럼 미술관 옆에 동물원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서울랜드에 동물원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은 이곳의 이정표를 보고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술관과 동물원이 나란히 있는 형상이 어딘가 낯설었던 모양이다. 지금 미술관 옆에는 동물원뿐만 아니라 캠핑장, 경마장, 과학관 등이 일대에 모여 있어 그때보다 더 다이내믹한 동거가 이어지고 있다.
과천관은 공간의 원형보존이 우선시되는 덕수궁 석조전을 벗어나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대규모 미술관이 필요하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세워졌다. 후보지 중에는 대전도 포함됐었다고 하니 반드시 수도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신문기사들을 찾아보면 '어디'인가 보다는 '어떻게'가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주, 캐나다, 일본의 사례들과 비교하며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국제적인' 스케일로 지어야 한다고들 주장했다. 더구나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차례로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대규모의 최첨단 현대미술관을 짓는 것은 미술계 안팎으로 중요한 이슈였을 것이다. 그렇게 드넓은 야외 조각 전시장까지 갖춘 총면적 2만2000평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완성됐다.
건축가의 고집이 만들어 낸 조화로움
더 넓고, 더 새롭고, 더 아름다운 미술관에 대한 욕망의 여론과는 달리,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의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김태수 건축가는 미술관 부지를 감싸안고 있는 청계산과 조화를 이루는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과천 현대미술관은 건물 전체를 화강석으로 지은 최초의 사례가 됐다. 지금이야 화강석 건물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건 우리나라 건물에 안 쓴다'라는 소릴 들었어야 했다고 한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대중교통으로도, 자가용으로도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지만 서울대공원에서 코끼리 열차를 타고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진리이자 낭만이다.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 시간인 데다 추운 날씨 탓에 방문객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미술관을 찾는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꽤나 많았다. 멀리 보이는 서울랜드 눈썰매장의 풍경은 설렜고 주변에 펼쳐진 산세는 평온했다. 그 가운데 자리 잡은 겨울철의 미술관 건물은 봄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는 조용한 대지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 모든 경험이 가능한 것은 미술관 건물이 산 능선 위에 내려앉듯 설계됐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날 좋을 때 나들이 가고 싶은' 장소가 된 것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건축가의 고집 덕분이라고 봐도 좋았다.
과천관에는 백남준 작가의 《다다익선》이 있다. 텔레비전 1003대를 쌓아 올린 거대한 비디오의 탑이다. 미술을 잘 모르더라도 백남준의 명성과 그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다다익선》이 세계 최대 규모의 비디오아트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을 법하다. 《다다익선》은 이곳 과천관이 개관한 직후인 1988년에 '장소 특정적'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이 미술관의 이 장소에서 전시되어야만 작가의 의도가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는 뜻이다. 관람객은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길을 따라가며 《다다익선》의 비디오 영상들을 감상하도록 돼 있다. 작품은 미술관 공간의 일부가 되고, 공간을 이동하는 관람객의 경험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다익선》을 구성하고 있는 텔레비전의 노후화가 심각해지면서 한동안 복원 작업에 들어갔었는데, 2022년 올해는 재가동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바람과 햇빛마저 작품의 일부
원형정원은 과천관의 또 다른 특별한 공간이다. 《다다익선》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다 보면 도착하게 되는 야외 전시장으로, 지금은 정원 디자이너 황지해 작가의 《원형정원 프로젝트: 달뿌리-느리고 빠른 대화》를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앞으로 2년간 이어지면서 그동안 변화하는 과천의 계절, 바람, 햇빛 모든 자연의 요소들이 작품의 일부가 될 예정이다. 정원의 식물들은 주변에 서식하는 새와 곤충들에게 먹이와 산란처가 될 것이라 했다. 겨울의 정원은 어딘가 조금 쓸쓸했지만, 이제부터 펼쳐질 변화가 더 기다려지는 풍경이었다.
자연을 닮은 거대한 미술관은 복잡하고 밀도 높은 장소를 피해 다녀야 하는 요즘 그 진가가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 전설적인 작품의 부활, 시간을 품은 새로운 형태의 전시와 함께 2022년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재발견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세워질 때의 독보적인 명성은 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많은 미술관 가운데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현대미술관'을 고민했던 현장을 보는 것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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