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7화) [연재소설]

에린 입력 2022. 1. 1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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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받아들이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렇습니다.”

의사는 깊은 숨을 내쉬며 병증을 자세히 설명했다. 헬리케이즈는 DNA 복제나 복구에 관여하는 효소인데, 이 유전자를 만드는 8번 염색체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이 유전자 돌연변이가 세라의 체내에서 발견됐다는 것이다.

의사는 학계에 보고된 통계자료를 봤을 때 안면 주름이 많아지거나 백내장, 탈모, 골다공증과 같은 증상이 수반될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예까지 드니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져 세라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치료는요?”

세라는 치료 방법이나 완치 여부가 궁금해졌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물었지만,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의사는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는 만큼 정기검진을 통해서 추적관리를 해야 한다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마지막 소임처럼 휴지를 뽑아 세라에게 내밀었다.

세라가 우두커니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았다. 진료실을 나온 뒤 뭘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의사는 타박상이나 상처로 인한 피부 궤양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위중한 병에 비해 주의 사항은 간단했다. ‘환절기 감기처럼 시간이 해결해 주지는 않을까.’ 세라는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상처나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 쓰라는 의사의 말을 생각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벽에 머리를 대고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복도 끝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기저귀를 찬 엉덩이를 뒤뚱대며 걸었다. 점점 속도가 붙더니 엇박자로 뛰다가 결국 바닥에 엎어졌다. 세라가 배를 깔고 넘어진 아이에게 다가가려 하자 아이 엄마는 의자에 앉아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세라는 아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안타깝게 쳐다봤다. 아이는 엄마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세라는 아이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내과 간호사실로 갔다.

“진료 기록서와 영상 사본을 좀 받고 싶은데요.”

상담 창구에서 오래 기다린 끝에 두툼한 봉투 하나를 받았다. 검사 기록지와 진단서, 영상 복사본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영지야, 저번에 갔던 병원이 어디라고 했지?”

세수하다 말고 거울을 한참 동안 주시했다. 눈, 코, 입, 귀를 찬찬히 훑어봤다. 기분 탓일까. 오른쪽 입꼬리가 약간 처져 보였다. 영지가 알려 준 대학 병원에서도 같은 진단명이 나왔다. 오진일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세라는 병원에 다녀온 후에 몸에 이상 반응이나 증상이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간혹 올라오는 뾰루지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수증기로 뿌옇게 된 거울을 손으로 다시 닦았다.


의사는 당장은 직장생활에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회사를 그만두길 권했다. 외모의 변화를 이겨낼 수 있겠냐며 회사에서 받게 될 스트레스를 걱정했다. 채 상무와 김선형, 회사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며 수군거리는 장면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다 찾아봤지만,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의사가 말하지 않았는가.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고. 살면서 소액 복권 당첨은 물론 회사 야유회에서 제비뽑기 운조차 없었다. 인제 와서 백만분의 일의 확률을 뚫는 운이 생기다니 세라는 실소가 나왔다. 인터넷에서 본 환자들의 메마른 나무 같은 모습이 자신의 얼굴과 겹쳐졌다. 마치 실루엣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앙상한 골격이었다. 그들은 상상도 못 할 고통을 겪었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생활고에 시달렸다.

커뮤니티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보며 가까운 미래를 상상한다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거울부터 찾았다. 아무런 증상 없이 몇 주를 보냈다. 며칠 밤을 악몽에 시달렸다. 잠을 못 잔 것 외에는 육체적으로 불편한 구석도 없었다. 회사 일이 바쁘거나 퇴근 후 친구들과 한잔 기울이는 동안에도 세라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조차 잊어 버렸다. 그날의 충격과 공포는 무장 해제되어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서늘한 바람에 겉옷을 하나씩 꺼내 입기 시작했다. 갈색 반점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쟁기질하는 농부의 거칠고 두꺼운 손바닥처럼 조금씩 딱딱해져 갔다. 의사는 처방받은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도 관성적으로 진행되는 경직화를 멈추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여차하면 회사는 그만두면 됐다. 엄마를 생각하면 신경이 곤두섰다. 가족이라고는 엄마와 단둘뿐인데 세라는 지독한 병에 걸렸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믿기나 할까.’ 엄마가 의사를 찾아가 멱살잡이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불편한 얘기를 대신해 줄 다른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세라가 다른 친구들처럼 왜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냐고 묻기라도 하면 엄마는 당황스러워하며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었다. 사진 속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하나하나 설명할 뿐이었다.

사진이 아닌 진짜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가끔 엄마가 남은 가족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을 때 아빠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자주 웃던 아빠의 얼굴보다 응급실에 누워 있던 아빠의 처참한 모습이 먼저 떠오르면 기억하려 애쓴 걸 후회했다.

오래전,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정임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전화를 받았고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겁지겁 우산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엄마! 어디가?”

마루에 앉아 리코더를 불고 있던 세라가 정임이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나섰다.

정임은 슬리퍼를 신고 정신이 반은 나간 듯한 표정으로 돌아와 세라의 손을 꼭 잡고 대문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우산을 손에 들고 펴지도 않았다. 세라는 영문도 모른 채 한 손에 리코더를 들고 덩달아 빗속을 달렸다.

감기라도 걸릴까 봐 비 오는 날이면 우비에 우산까지 챙겨주던 엄마가 처음으로 비를 흠뻑 맞게 허락한 날이었다. 세라는 그것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던 길이란 걸 알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가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들고 아빠 이름을 댔다. 간호사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세라는 기억했다. 출근할 때 아빠는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명한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파란색 티셔츠는 걸레 조각처럼 앞섶이 갈라져 피에 물들어 있었다. 세라는 어지러워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정임은 붉은 옷 조각을 들고 울부짖었다. 세라는 옆에서 흐느끼다 소리쳤다.

“아빠는 파란 옷을 입었단 말이야! 이건 아빠가 아니라고!”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하였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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