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일간 암과 싸우고 결심했다, 더는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지 않기로 [책과 삶]

김지혜 기자 2022. 1. 1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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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술라이커 저우아드 지음 | 신소희 옮김 | 윌북 | 440쪽 | 1만7800원

갓 대학을 졸업한 22살에 생존률 35%의 백혈병 진단을 받은 술라이커 저우아드는 4년여의 투병과 생존 끝에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 속에서도 완전한 삶을 살아내려는 단단한 의지를 갖게 된다. ⓒBeowulfSheehan


배경은 뉴욕이고, 주인공은 프린스턴대를 갓 졸업한 22세의 여성이다. 파리의 법률회사에 취직해 출국을 앞둔 그는 새벽 5시까지 이어진 파티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장신의 보조개 미남이 묻는다. “배고프지 않아요?” 주인공이 답한다. “배고파 죽겠어요.” 커피와 베이글을 함께 먹으며 사랑이 싹텄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같이 살기 시작했고, 종군기자를 꿈꾸던 주인공은 유명 언론사 면접까지 훌륭하게 해치운다. 어디서 많이 본 미국 로맨스 드라마 줄거리 같지만, 이것은 로맨스도 드라마도 아니다. 저자 술라이커 저우아드가 온몸으로 통과한 1500여일 투병기의 서막일 뿐이다.

저우아드는 언론사에 입사하지 못했다. 대신 휠체어에 실려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생존율 35%의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그는 “다시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터”라고 생각한다. 사실이었다.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는 창창한 미래를 몰수당한 채, 20대 초반을 온통 절망과 고통으로 보내야만 했던 젊은 암 환자의 생존기다. 저우아드는 거듭되는 화학요법과 골수이식 수술, 그에 따른 온갖 합병증으로 끊임없이 구토하고 열에 신음하며 정신을 잃는 와중에서도, 조각난 삶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글들은 책이 되기도 전부터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개인 블로그가 먼저 화제가 됐고 뉴욕타임스에도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저우아드는 칼럼에 덧붙인 영상들로 에미상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했고, ‘테드(TED)’ 강연 무대에도 올랐다. 끝내 암을 이기고 직업적 성공까지 이뤄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병을 성공적으로 떨쳐낸 영웅의 감동 실화가 아니다. 치료 이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고통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기꺼이 삶을 사랑하기로 한 숭고한 결심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화제를 모았다.


“수술실에서 나온 내 몸을 마주한 순간, 지금까지의 삶은 산산조각나 사라졌음을, 어떤 면에서 과거의 나는 죽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이야기는 절망에서부터 시작된다. 저우아드 곁에는 만난 지 6개월 만에 간병에 나선 연인 윌, 물심양면으로 치료를 돕는 부모님, 골수를 이식해 줄 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충분하지 못했다. 그의 삶은 이미 암이 됐다. 치료는 고통스러웠고, 마른 몸과 민머리는 어딜 가나 침묵을 불렀다. 불임이 됐고 성기능 장애가 생겼지만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그는 사랑하는 윌이, 부모님이, 동생이 병든 자신을 내버려둔 채 각자 삶을 이어가는 것만 같아 질투가 났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무서우리만치 솔직하게 기록했다.

저우아드는 “고통이 바짝 말라붙을 때까지” 쓰고 또 썼다. 미친 듯이 써내린 글은 다행히 회복의 마중물이 됐다. 그는 서서히 내면의 힘을 회복하고, 작가로서 명성을 얻으며, 다른 암 환자들과 교류하며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4년여간 이어진 치료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병의 호전은 다른 기대를 불러왔다. 암을 털어내기만 하면 빼앗겼던 미래를, 건강했던 일상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있다는 당연한 기대. 저우아드는 암 생존자에게 응당 기대되는 극복 서사에 제 삶을 꿰맞추려 애쓰며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에 집착”했다. 그러나 이내 깨닫는다. 그것은 “실체 없는 신화”이며 “현재의 삶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저우아드는 투병 중 편지를 보내왔던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치료 종료 이후 미국 전역 2만4140㎞를 달리는 자동차 여행을 감행했다. 사진에서 굵게 표시된 선이 저우아드가 여행한 경로다. 윌북 제공


책의 원제 ‘두 왕국 사이에서(Between Two Kingdoms)’는 수전 손태그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 속 문장에서 따온 말이다. “인간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두 곳의 이중국적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는 좋은 여권만을 사용하기를 바라지만, 누구든 언젠가는 잠시나마 다른 쪽 왕국의 시민이 될 수밖에 없다.” ‘질병의 왕국’과 깨끗이 결별하고 ‘건강의 왕국’으로 고이 돌아가고 싶었던 저우아드의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암 치료를 마치고 감행한 자동차 여행길에서다. 그는 투병 중 편지를 보내왔던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 전역 2만4140㎞를 달렸다. 불치병과 함께 열정적으로 살아온 노교수, 자살한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어머니,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사형수…. 이들은 질병 혹은 죽음을 껴안은 채로도 삶과 건강을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여행은 새로운 깨달음으로 저우아드를 안내했다. “나는 문득 질병과 건강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생각한다. (…) 아름답고 완벽한 건강이라는 닿을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끝도 없는 불만족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저우아드는 더 이상 암 환자가 아니지만 아침마다 약을 한 움큼씩 삼킨다. 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린다. 변해버린 관계에 괴로워한다. 암은 치료됐지만 삶은 여전히 엉망이다. 그러나 고통 하나 없는 ‘건강의 왕국’으로 돌아갈 길 따윈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젠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지 않는다. 넘어지고 상처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엉망으로 다치고 더러워진 채로도 삶의 축제를 벌일 수 있다. 고통을 직시한 채로 삶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생존자 저우아드가 길어올린 진짜 희망이다. “치유란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박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을 과거에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치유란 앞으로도 항상 내 안에 살아 있을 고통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되, 고통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고 삶을 고통에 빼앗기지 않는 일이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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