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당신의 비밀을 품은 방

한겨레 2022. 1. 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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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전명희의 질문하는 집]질문하는 집
공간 특유의 정취 우러나는 집
가구부터 소품까지 주인 닮아
방의 사물 통해 나를 재발견
물건 정리 땐 테마별로 분류
제주도의 빌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의 집이다. 전명희 제공

공인중개사라는 직업 특성상 타인의 방을 자주 방문하게 된다. 타인의 방에 첫발을 내딛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설레는 마음도 크다. 누군가의 방을 본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간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의 가치관과 취향, 생활 습관까지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도 한다. <에스비에스>(SBS)의 예능 프로그램 ‘나의 판타집’에서 유현준 건축가가 집 안의 풍경만 보고도 거기에 사는 사람의 성격을 정확하게 유추해내지 않던가. 물론 셜록 홈스 뺨치는 그런 추리력이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니지만, 타인의 방을 본다는 것은 단순한 인테리어 구경 너머의 일이다.

여러 집을 방문하다 보면 유독 그 공간 특유의 정취가 우러나는 집이 있다. 그런 집들은 가구부터 소품 하나까지 공간과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진열된 물건이 사실은 그리 대단한 물건이 아님에도 괜스레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군요!’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사는 ‘사람’과 ‘집’이 닮아 있다. ‘사람’과 ‘집’이 마치 일심동체가 된 듯한 느낌이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섬세하게 놓인 사물들에 말이라도 걸면, 이 집에 오게 된 저마다의 사연을 한 보따리씩 풀어낼 것만 같은 착각도 인다. 때로는 말이 없는 사물에게서 사람에 대한 더 많은 내밀한 단서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주인이 애정을 담아 집에 들인 사물들이 고마움의 표현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대신 수납하고 있는 건 아닐지….

강릉 교동의 단독주택. 전명희 제공

사물을 통해 나를 만난다

최근 부모님 댁에 몇 가지 짐을 가지러 갔다가 문득 내 방의 사물들을 통해 나란 사람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물건을 그리 잘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일년에 한두번 옷에 ‘플렉스’ 하는 걸 보면 물욕이 완전히 없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떤 물건에 대한 필요를 잘 느끼지 못한다. 대체로 하나를 사면 오래 사용하는 편이고, 한번 방에 들인 물건은 (신중하게 들였으므로) 협박에 가까운 잔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좀체 버리지 않는다. 휴대폰은 최소 4년 이상씩 쓰며, 누군가는 진즉에 갈아탔을 차도 여전히 몰고 다닌다. 방에 들인 가구들은 대개 엄마가 15년 전에 취미로 만들어주신 것들이고, 책상 위에는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원목 책꽂이와 연필통, 그리고 초등학생 때부터 쓰던 연필깎이가 놓여 있다. 비록 유튜브에 소개될 만한 해외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빈티지 가구와 소품들은 아니지만, 나만의, 또 우리 가족만의 기억이 사물에 깊게 배어 있어 그런지 그런 사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마냥 좋다.

엄마가 쓰시던 보석함과 트레이. 전명희 제공

그러고 보니 새로 사는 물건이라 해서 꼭 새 제품만을 사는 것도 아니다. 작년 여름 큰맘 먹고 제주도에서 12각 원목 쟁반을 공수해온 일이 있다. 개다리소반의 상판을 자르고 남은 자투리를 활용하여 만든 업사이클링(새활용) 제품으로, 각 부분의 색상과 무게감이 저마다 다른 것이 특징이다. 개다리소반 자체를 제주 전역에서 버려진 자재들을 수집·가공해 만들었다는 점 또한 구매욕을 자극하는 데 한몫했다. 여러모로 나는 오래된 것이 내 가까이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인 듯하다. 흠집이라도 날 성싶어 항상 조심스러움을 요구하는 새것과 다르게 헌것에서 느껴지는 그 편안함이 좋다. 그리고 세월이 자아내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 멋있게 느껴지고, 내면에 무언가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신비로움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제주도에서 산 쟁반. 전명희 제공

그리고 내 방의 벽과 문을 보면 갖가지 엽서와 포스터, 사진, 내가 그린 그림들이 저마다 각개전투를 하듯 붙어 있다. 또한 에스닉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탓에 커튼과, 카펫, 침구류까지 모두 화려한 무늬와 색깔이 들어가 있어 언뜻 보면 통일감이란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색과 무늬를 매치시키며 그 안에서 조화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즐겁고, 한 가지 스타일이 주는 단조로운 느낌보다는 컬러풀함과 비대칭적인 무늬가 주는 자유분방한 느낌을 선호한다. 방 안의 몇 가지 사물에 대해서 얘기했을 뿐인데도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이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가 더욱 명확해지는 것 같다. 이처럼 방 안에 배치된 사물들과 그 방의 분위기를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에 대해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다. 이 기회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곳에 있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은 사물들을 통해, 그동안 알고 있던 내 모습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미처 모르고 있던 내 모습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해보기 바란다.

별집 사무실 내부. 전명희 제공

물건들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마지막으로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방이 사물에 잠식당하거나, 창고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보고자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위한 팁을 하나 공유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내 방의 사물들을 테마별로 나열해보자. 테마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정하면 된다. 예를 들어, 내 방의 침대 벽면에는 눈을 마주치면 미소가 절로 나오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이 포스터를 ‘나를 미소 짓게 만드는 사물들’의 테마에 집어넣는 식이다. 만약 테마를 정하는 게 어렵게 느껴진다면, 임진아 작가의 두번째 에세이 <사물에게 배웁니다>를 참고하시라. 책에 ‘생활을 키우는 사물들’ ‘행복이 담긴 사물들’ ‘시간이 머무는 사물들’ 등 참고하면 좋을 여섯 가지 테마가 나온다. 이렇게 테마별로 사물들을 분류하다 보면 마지막에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사물이 남게 되는데, 이는 주인 없는 물건과 다를 바가 없다. 이제 이 물건과는 과감하게 작별을 고하면 된다. 앞으로 물건을 살 때도 이 과정을 떠올린다면, 방 안이 의미 없는 물건들로 양적 팽창 될 일은 없을 거다.

글·사진 전명희 (별집 대표)

별집 사무실. 좋아하는 책과 엽서. 전명희 제공
주거와 작업실을 겸한 한남동의 한 스튜디오. 전명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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