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의 지리각각] 카자흐스탄, 너무나 치명적 유혹

이규화 2022. 1. 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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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되는 美 중앙아 거점 시도
친중 부패에 대한 누적된 불만
절호의 기회 놓치지 않은 푸틴
앉아서 당한 中, 어부지리 美
카자흐 지정학적 유혹은 여전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카자흐스탄에 특사를 보내 카자흐스탄 내 미군사기지 배치를 타진했다가 거절당했다. 그해 8월 말까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철군한다는 계획이 완료되면 중앙아시아에 생길 미국 힘의 공백을 메워보려는 계산이었다.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이 미국의 제안에 난색을 보인 이면에는 러시아가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공개적으로 미국이 카자흐스탄에 미군기지를 건설하려면 카자흐스탄이 가입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들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CSTO가 바로 이번 카자흐스탄 시위의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한 군사조약기구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6개국이 회원국이다. 옛 소련연방국 모임인 CIS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라 할 수 있다. 군사기지 제안이 거절당한 데 이어 러시아군이 주축이 된 CSTO가 카자흐스탄에 진입함으로써 미국에 또 한 번의 작지만 쓰린 외교적 실패를 안겼다.

◇전격적 대처에 성공한 러시아

이번 폭동사태는 러시아 공수부대 2500명이 전격 전개돼 카자흐 최대 도시 알마티와 수도 누르술탄(옛 아스타나)을 장악하면서 일주일 만에 진압됐다. 군경으로도 사태 진압을 못했던 토카예프 대통령이 11일 새 총리를 지명하고 질서를 회복했다고 선언하면서 카자흐는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다. 진압의 일등 공신은 명백히 러시아다. 따라서 앞으로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의식한 듯 미국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러시아는 한 번 군사를 주둔시키면 철군할 줄 모른다'며 러시아군의 장기 주둔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러자 러시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은 진압 목적이 달성되는 대로 철군할 것을 밝혔다. 토카예프 대통령도 이를 확인했다. 그러나 철군이 문제가 아니다. 외신보도들에 따르면 이번 사태의 진압에 토카예프 정부는 러시아에 단단히 신세를 졌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카자흐 국민들의 친(親)러 성향도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크라이나를 놓고 벌이는 미국 및 EU(유럽연합)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으로 관측된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또 다른 유리한 카드를 쥐게 됐기 때문이다.

◇자원부국에서 LPG 가격 폭등 시위

이번 폭동 사태는 지난 4일 악타우에서 시민들이 LPG(액화천연가스) 가격 폭등에 항의하는 평화로운 시위에서 비롯됐다. 처음 정부의 대처가 미온적이자 전국으로 삽시간에 번졌고 폭력화됐다. 누르술탄의 대통령궁이 불타고 최대 도시 알마티 방송국 건물도 화염에 휩싸였다. 공항도 불타고 파괴됐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알마티에서만 2만명의 테러분자들이 폭력시위에 가담했다"고 밝혔다. 군 병력까지 투입했으나 진압하지 못했다. 그러자 CSTO에 지원 손길을 벌린 것이다.

이번 폭동사태는 우선 카자흐스탄 국민들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봐야 한다. 전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1990년 카자흐스탄 독립 때부터 2019년 3월까지 거의 30년간 1인 독재를 했다. 전국 곳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대통령에서 물러났으면서도 국가안보회의(NSC) 의장을 맡아 토카예프 대통령의 상왕 노릇을 해왔다. 그런가 하면 그의 가족들은 해외로 자금을 빼돌려 거대한 부패 왕국을 만들었다. 나자르바예프 딸과 동생 등이 유럽과 미국 등지에 사들인 부동산만 해도 수억 달러에 이른다. 시위대들이 나자르바예프 동상을 끌어내리고 "카자흐스탄에서 떠나라"고 외친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부패의 원천은 카자흐스탄의 풍부한 천연자원에서 나왔다. 나자르바예프는 30년간 독재를 하면서 친족들과 측근들에게 그 이권을 넘겼다. 우라늄은 세계 매장량의 40%를 점하고 있고 원유, 천연가스, 철광석, 금, 망간, 다이아몬드에 희토류 부존량도 풍부하다. 원유는 세계 부존량의 11%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LPG 가격 폭등이 폭동사태의 원인이 된 이유는 정제 등 산업시설이 충분하지 않고 부패사슬에 의해 외국자본에 매어있기 때문이다.

◇제기되는 외세 개입설

토카예프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 외세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그는 외국에서 훈련받은 테러분자가 카자흐스탄으로 들어와 선동한 무장침략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 외세가 누구인지는 특정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지난 10일 CSTO 국가 정상간 회상회의에서 카자흐스탄 폭동사태는 카자흐 내부 세력이 외부세력과 결합해 일으킨 '마이단(사람들이 모이는 장터) 방식' 폭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도 외부 세력이 어떤 세력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은 이번 사태는 겉으로는 LPG가격 폭등에 대한 항의 시위였지만 진짜 목적은 정권 타도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시위의 양상을 보면 반독재 민주화 시위라고는 보기에 어려운 점이 있긴 하다. 너무 파괴적이었다. 조직적 성격도 있다. 정부기관 점령에 그치지 않고 민간 건물과 기물을 닥치는 대로 파손했다. 상점도 난입해 상품을 훔치는가 하면 ATM을 부수고 현금을 빼내갔다. 카자흐 당국에 따르면 외부 세력의 개입 증거도 속속 나오고 있다. 당국은 체포된 시위대 중 300명가량의 우크라이나 전문 시위 꾼이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외신의 시위대 영상을 보면 시위대 속에 빨간색 점퍼를 입은 사람이 눈에 띈다. 이 사람은 시위대에 섞여 같이 움직이면서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하거나 손짓을 하고 나눠주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중국의 친정부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이번 카자흐스탄 소요사태에는 미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고 지난 13일 보도했다. 공산당 기관지격인 언론이어서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지만, 전혀 가당치 않은 주장은 아니다. 글로벌타임스는 카자흐스탄 주재 미국대사관이 이번 사태를 보름 전부터 예상했다는 점을 든다. 그때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일군의 NGO들이 '폭동의 냄새'를 맡고 카자흐로부터 발을 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문은 ICNL(International Center for Not-for-Profit Law)이라는 NGO는 카자흐에서 최대 3만8000명, 최소 2만명이 미국과 유럽 각국의 지원을 받고 활동해왔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국제개발 원조단체인 USAID와 NED, 프리덤하우스 같은 단체들도 포함돼 있다. NED는 2020년에만 카자흐 인권운동에 100만 달러(12억원)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글로벌타임스는 유라시아그룹 얼 라스무센 부대표의 말을 인용해 이번 폭동사태의 배경에는 NGO와 미국 정부가 주요 플레이어였다는 주장도 했다.

◇카자흐의 지정·지경학적 치명적 유혹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카자흐스탄은 유라시아대륙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지리적으로 카자흐스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북쪽과 동쪽에는 각각 러시아와 중국이 자리잡고 서남쪽으로는 중동(서남아시아)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인도와도 가깝다. 고대로부터 초원의 길과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길목이었고 현대에 들어서도 두 강대국을 아울러 견제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더구나 풍부한 천연자원과 272만㎢(세계 9위)라는 광대한 국토를 갖고 있다. 이렇게 매력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데도 인구는 1900만명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세계를 경략하는 초강대국이라면 지정학적·지경학적으로 치명적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즉 카자흐스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글로벌 세력균형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카자흐스탄은 나자르바예프 30년 독재기간 동안 친중적 노선을 걸었다. 중국의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일가 부패왕국도 중국 자본이 뒷받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카자흐에서 유전을 개발해 카자흐 원유 수출의 17%를 점하고 있다. 일대일로 측면에서도 카자흐는 중국에 없어서는 안 될 국가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대륙횡단 철도는 중국 충칭에서 출발해 카자흐를 경과하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거쳐 독일로 연결된다. 또한 카스피해 원유를 중국으로 도입하는 송유관은 카자흐스탄을 통과해야 한다. 중국이 추진하는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위해서도 카자흐의 우라늄 확보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중국으로선 카자흐스탄의 전략적 가치가 거의 사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난 30년간 공을 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중국은 일격을 당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이 친중적 행보를 걸었던 전임 나자르바예프를 NSC 의장에서 축출하고 그의 측근들을 사태의 책임을 물어 몰아낸 것이다. 카자흐스탄이 친러로 돌아섰다고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러시아는 그동안 카자흐스탄의 친중 행보에 속앓이를 해왔다. 절호의 기회가 오자 재빨리 낚아챈 것이다. 이번 사태는 우크라이나에도 시시하는 바가 크다. 러시아는 카자흐 내정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고 소요사태를 진압하면 즉시 떠난다는 메시지를 계속 내고 있다. 이는 친서방으로 돌아서 나토(NATO)에 가입하려고 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겐 매우 유화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에서 미국의 득실은 무엇일까. CIA가 NGO를 통해 폭동을 부추겼다는 글로벌타임스 류의 음모론적 시각도 있긴 하지만, 그대로 믿긴 힘들다.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힘의 투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맞다. 작년 8월 말 아프가니스탄 철군에 따라 현재 미국의 중앙아시아 군사기지는 하나도 없다. 미국은 9·11 테러 후 아프간전쟁 중이던 2001년부터 12년간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 근교 마나스에 공군기지를 운영한 적 있다. 현재 중앙아시아와 가장 가까운 미국 군사기지는 카타르 기지다. 유사시 중앙아시아에 군병력을 전개하기에는 너무 멀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에 미 군사기지를 타진했던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미국은 '카자흐스탄의 친러 노선'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마주해야 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크게 손해볼 것도 없다. 현재 미국의 세계전략은 패권화 하는 중국 공산당을 봉쇄하는 것이 제1의 타깃이다. 그 다음이 러시아 견제다. 카자흐스탄에 군사기지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제1 목적 때문이었다. 이번 사태로 카자흐에서 중국의 세력이 악화된 것은 미국 입장에선 반가운 일인 것이다. 어찌 보면 미국은 이번 사태에서 중국 견제라는 목적을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식'으로 해결한 셈이다.

이번 카자흐스탄 폭동사태의 최악 피해자는 160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는 사망자와 최대 30억 달러로 추정되는 피해를 입은 카자흐스탄 국민이다. 그 다음이 중국이다. 최고의 수혜자는 러시아이고 미국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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