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런치 모드·디졸브.. 갈수록 가혹해지는 일터

나윤석 기자 2022. 1. 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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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존버씨의 죽음│김영선 지음│오월의봄

기술발달로 노동력 빈틈 제거

휴식권 보장 못받고 항시 대기

과로사 등 산재심사도 불명확

“노동자 사명감 의존 벗어나야”

“존버(무작정 버티다의 줄임말)는 21세기식 감내의 언어다. 갈아 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과로+성과 체제’에 사는 우리는 모두 ‘잠재적 존버씨’다.”

사회학자 김영선의 ‘존버씨의 죽음’은 과로로 인한 번아웃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추적한다. 전작 ‘과로 사회’(2013년)에서 장시간 노동 현실을 포착했던 저자는 점점 가혹해지는 근로 현장을 보여준 뒤 불명확한 산재 심사 분석을 통해 ‘현상적으로는 밀접한’ 과로와 죽음을 ‘분리하는’ 담론에 문제를 제기한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근로자의 사망 소식은 개인적·우연적 사건이 아닌 ‘실적이 곧 인격인’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집단적·필연적 비극이라며 법과 제도 개혁, 노동권에 대한 감수성 향상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금융·정보기술(IT)·방송 등 일부 업계의 ‘일터 은어’는 열악한 근로 조건과 수직적 위계 문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게임업계에선 밤샘 근무를 ‘크런치 모드’라 지칭한다. 상품 출시가 임박했을 때 마치 견과류를 으깨듯 노동력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의미다. 방송계 은어인 ‘디졸브’는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없는 살인적 촬영 일정을 뜻한다. 선배 간호사가 후배를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괴롭혀 길들이는 ‘태움’, 콜센터 노동자가 화장실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메신저로 보고하는 ‘화출·화착’ 등도 실적 압박과 취약한 노동권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은어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기술 발전은 노동력의 ‘빈틈’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쪼개 활용하는’ 관행을 만들고 있다. 세계 최대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의 ‘크로노스’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이 시스템은 일기예보와 보행량 등을 분석해 시간 단위로 필요한 인력을 산출한다. 폭염이나 미세먼지로 이동량이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면 교대 인력을 줄여 노동비용을 최소화하는 식이다. 근로자들은 일이 없을 땐 ‘항시 대기’ 모드로 ‘콜’을 기다리지만, 고객이 몰릴 땐 밤늦게 매장 문을 닫고 퇴근한 뒤 새벽에 다시 출근하는 ‘클로프닝(clopening)’을 반복한다. 스타벅스를 시작으로 맥도날드·월마트 등 서비스·유통업계가 유사 시스템을 잇달아 도입하며 관련 근로자들은 휴식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감염병이 일상이 되면서 재난 현장의 노동 강도도 심해졌다. 보편적 노동권이 민간 사업장에선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다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같은 긴급 상황에선 헌신·사명감·직업 정신을 강조하는 ‘봉사자 이데올로기’에 의해 간과되거나 무시된다. 저자는 “기후위기 시대의 재난은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한 ‘블랙 스완’이 아니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정상 사고’”라며 “만성적 인력 부족을 해결해 근로자의 사명감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노동 조건이 열악해지는 일터에서 과로사나 과로 자살은 필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비교적 인과관계가 분명한 과로사에 비해 과로 자살의 산재 승인 비율이 턱없이 낮다는 점이다. 실제로 저자가 2017년 업무상 사유로 자살 산재를 신청한 63건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63%가 넘는 40건이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심사 기관은 ‘과거 치료력’ ‘통상적 수준의 스트레스’ ‘개인적 취약성’ 등을 근거로 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저자는 과거 치료력이 있어도 일터에서 질환이 재발했을 가능성을 따져야 하고, ‘통상적’ ‘개인적’처럼 기준이 불명확한 상투어의 남발을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재 통계는 여전히 ‘과로 죽음’에서 ‘과로’를 분리해 근로자 사망을 개인적 비극으로 환원하는 담론이 지배적임을 확인시킨다.”

이에 저자는 산재 심사 과정의 명확한 기준 마련과 함께 과로사 자체를 줄이기 위한 제도와 문화 개선을 주문한다. 주 52시간 제도의 실질적 정착을 위해 과도한 예외 조항을 축소하고, 공교육 과정에 노동권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직장 문화 변화를 유도하자는 것이다.

책은 ‘일터가 사회적 살인의 장소로 전락했다’는 선언적 명제를 다양한 사례와 실증적 팩트로 입증하며 기업 관리자와 정책 당국에 “이대로 방치하지 말라”는 각성의 메시지를 던진다. 다만 ‘노동자는 선한 피해자’ ‘자본과 기업은 악독한 가해자’라는 도식은 다소 거칠고 이분법적으로 느껴진다. 이와 함께 ‘일’의 존재 의미를 외면한 채 부정적 측면에만 집중하는 것도 거슬리는 대목이다. 대다수 ‘존버씨’는 먹고살기 위해 버티는 것만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존감과 보람을 얻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64쪽, 1만9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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