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부 책을 읽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한겨레 입력 2022. 1. 14. 05:06 수정 2022. 1. 1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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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Book] 나의 첫 책][나의 첫 책] 김용택
고등학생 때 책을 처음 보았다!
산골 분교에서 산 첫 월부 책
읽고 나니 모든 게 새로워져
책 읽기 13년 만에 '섬진강' 써
김용택 시인. 김용택 제공
김용택 시집. 섬진강.

나는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교과서 외에 다른 책을 읽지 못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책을 읽은 사람이 없었다.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나는 교과서 말고는 다른 책을 볼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어떤 친구가 쉬는 시간에 교단에 올라가 ‘모택동’이라는 제목의 책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한 기억이 있다. 나는 모택동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같은 반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책장을 처음 보았고, 여러 개의 책장에 책들이 층층으로 나란히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가정집에 책이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때 책장 속에서 ‘사상계’ 라는 책 이름을 본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주로 영화를 보며 지냈다. 순창 극장에 들어온 영화는 거의 다 보았다. 돈이 없어서 일주일 먹을 쌀 중에 점심을 안 먹고 남은 쌀 한 되를 팔아 영화를 보았다. 돈이 없는 몇몇 영화 마니아들은 새로운 영화가 들어오면 극장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놀았다. 하도 오랫동안 영화를 보아 왔기 때문에 극장표를 받는 아저씨가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돈이 없는 날 친구들이랑 극장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상영 시간이 10여분쯤 지난 영화를 무료로 보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첫 발령지는 깊은 산골 작은 분교였다. 어느 날 그곳으로 월부 책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전집류들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많은 책 사진들을 보았다. 내가 알 수 없는 책들은 장정이 화려했다. 나는 관심이 없었다. 월부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어느 날(나는 ‘어느 날’이란 말이 좋다), 그 어느 날 그 사람은 도스토옙스키 전집 사진을 보여 주었다. 책 표지가 노란색이었다. 책이 두껍고 넓었다. 전집은 일곱 권이었다. 나는 그 책을 사기로 했다. 내 돈을 주고 책을 산다는 거래가 처음이어서 이상하게 두렵고 떨렸다. 한 달에 얼마씩 1년 열두 달로 책값을 나누어 주면 되었다. 월급날이면 그가 찾아왔다.

책을 보려고 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책 장정이 멋지고, 책 표지에 실린 지은이의 사진이 멋있었다. 책을 가져다가 방에 두고 몇 날 며칠이 지났다. 책이 두꺼워 목침같이 베고 자기도 했다. 겨울방학에 되었다. 선생이 된 후 처음 맞는 방학이었다. 어느 날 나는 베고 있던 책을 엎디어 읽어 보기로 했다. 이런! 한 장 한 장 읽어 가면 읽어 갈수록 나는 책 속에 빠져들었다. 첫 책이 <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이었다. 놀라운 일이 내게 벌어졌다.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친구들하고 나무를 가고 토끼몰이를 가는 것도 잊었다. 밥을 먹고 소변을 보는 시간도 아까웠다. 밤을 하얗게 새우기도 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다. 그때 그 아침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살던 우리 마을의 모든 것들이 다 새로 보였다. 나는 새 세상에 발을 내리고 새 세상을 걸었다. 내가 살던 마을의 느티나무, 산 능선, 강가의 바위들, 논과 밭과 마을 사람들이 내게 낯설고 다시 보였다. 강물에 떨어진 달빛이 저렇게 아름다운 줄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늘 보던 나무가 새로 보이면 사랑 아니던가. 그 후 그 월부 책을 파는 그 사람은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이어령, 서정주, 박목월, 니체 전집을 권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나는 내가 상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리곤 했다. 책을 읽을수록 나는 내가 든든해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책을 읽어 가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다. 생각들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그 생각들을 썼다. 그렇게 생각들을 쓰다가 어느 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시를 써 놓고 그 시를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몇 해가 흐른 후, 내가 쓴 시를 나는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신이 났다. 책을 본 지 13년 후 어느 날 밤 숙직실에서 밤을 새워 ‘섬진강 1’을 썼다. 그때가 1981년 11월이었다. 시를 옆에 있는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그가 좋은 시라고 했다. 그 무렵 쓴 시들을 모아 만든 책이 나의 첫 시집 <섬진강>이 되었다.

맑은 날

시집 <맑은 날>의 시들은 <섬진강>을 낼 때 이미 써 놓은 시들이다. 할머니가 사는 큰집은 지금 내가 사는 이웃집이다. 진달래가 피기 시작 한 어느 날 이른 새벽 큰집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마을로 퍼졌다. <맑은 날> 시집 속의 시 ‘맑은 날’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부터 장례가 끝날 때까지의 이야기다. 삼일장이었다. 사흘 동안 정말 날이 맑았다.
창비(1986)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언어 동원 능력으로 평가된다.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생생한 언어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확보하고 있는지 그 포함의 범위가 한 편의 시를 말해준다. 나는 이 시집의 시들로 인해 시를 다시 쓰는 자신감을 얻었다. 시인의 긍지는 모든 것들을 물리친다. 우리 인류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창비(2013)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한 편 한 편이 마음에 드는 시라서 누구에게도 부끄럽거나 걱정스럽지 않다고 했던 말까지 다 좋았어요.’ 어떤 이에게 내가 그렇게 말했단다. 처음으로 나에게, 시에게 미안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의 시가 나에게 기대고 날아오르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시를 알고 썼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을 내놓고 아침 산책길에 얻어 쓴 글이다.
문학과지성사(2021)

섬진강 이야기(전 8권)

아무리 시를 써도 내가 사는 작은 강 마을 이야기를 시로 다 담아내지 못했다. 어느 해부터 나는 마을 이야기를 하루에 원고지로 20매 이상 쓰기로 작정했다. 그 책이 산문집 <섬진강 이야기>(전8권)로 모아졌다. 내 글들은 모두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의 이야기들이다. 내가 사는 동안 내가 쓸 모든 글들도 내가 사는 마을 이야기들일 것이다.
문학동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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