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죽음의 사회, '존버'하던 삶은 어떻게 스러지나

안선희 2022. 1. 1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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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노동, 실적 압박, 괴롭힘의 3중고
"예민해서" "유리멘탈" 개인 탓 돌려
일터의 구조적 문제 은폐하고 재생산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존버씨의 죽음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일터는 어떻게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는가
김영선 지음 l 오월의봄 l 1만9000원

‘존버’(‘존나게 버틴다’의 줄임말)는 비트코인 열풍이 유행시킨 은어지만, 오늘날 수고로운 노동의 현장 속에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많은 이들의 언어이기도 하다. <존버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존버하는 삶’을 강요하는지, 그리고 그중 일부가 어떻게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지를 추적한다.

책은 ‘존버’하던 삶의 죽음을 ‘과로죽음’으로 규정한다. ‘과로’는 통상 말하는 장시간 노동뿐만 아니라 야간노동, 실적 압박, 직장 내 괴롭힘 등을 포괄한다. 이런 요소들이 얽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노동자는 과로사하거나 과로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과거 발전주의 시대 과로죽음이 주로 살인적으로 긴 노동시간에 의한 것이었다면, 현재 신자유주의 시대 과로죽음은 경쟁적인 성과체제가 정착되면서 극심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주요한 원인으로 떠올랐다는 점이 다르다. 과거에는 적어도 회사 문을 나서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현재는 퇴근을 해도 업무에 대한 고민이 끝나지 않는다. 성과평가 시스템 탓에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자신의 노동을 짜낸다. ‘카톡 감옥’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 디지털 모바일 기술은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노동자를 회사에 구속시킨다. “질식할 것 같은 경쟁 시스템이 유발하는 정신적 고통, 공황, 우울증, 불안, 고독, 공격성이 흘러넘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아이티(IT)업계 개발자의 돌연사와 자살에 대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은 이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프로젝트는 기한 내에 끝내야 하는 빅뱅 방식이었다. 쫓기고 쫓기는 중압감은 상상을 넘어선다. 수행사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개발자들을 쥐어짠다.(…) 개발자들은 스트레스에 공황장애, 뇌졸중, 심근경색 등 항상 위험에 놓여 있다. 과연 개인의 죽음일 뿐인가?” “난이도와 상관없이 일주일에 무조건 몇 개를 채워야 하고 개인별 실적을 일일이 공개하며 (…) 무리한 수정 요청과 실적을 체크하는 그들의 무시와 압박은 모멸감을 가지게 합니다.” 한 증권맨은 이렇게 말한다. “앱을 통해 개인별 실적, 팀별 실적이 다 뜬다. 1등부터 줄 세우기가 가능하다. (…) 정규직이라 해도 고정급은 20% 정도이고 나머지 80%는 매출 실적에 따른다.”

일터 은어는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일터 환경”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또 하나의 도구다. 아이티·개발 노동자의 ‘크런치 모드’(마감 전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에 이르는 야근·밤샘 근무 기간), 콜센터 노동자의 ‘화출·화착’(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메신저로 보고하는 것), 방송 노동자의 ‘디졸브’(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없을 정도로 장시간 밤샘 촬영 하는 것), 우편집배원의 ‘겸배’(집배 인원에 결원이 생기면 그 구역을 동료가 분담해 배달해야 하는 상황), 서비스 노동자의 ‘클로프닝’(밤늦게까지 일하다 매장 문을 닫고 퇴근한 뒤 몇 시간 만에 다시 새벽에 출근해 매장 문을 여는 상황),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의 ‘분급’(분 단위로 계산하는 급여) 등등.

문제는 이런 환경 속에서 노동자가 느끼는 고통, 더 나아가 자살로 이어지는 많은 경우가 개인의 탓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쟤는 원래 예민해서 그래’ ‘나약해 빠져 가지곤’ ‘완벽주의 성향’ ‘유리 멘탈, 두부 멘탈, 쿠크다스 멘탈’ ‘멘존약’(멘탈 존나 약함) ‘능력이 없어서’ 등의 표현이 횡행한다. ‘그렇게 힘들면 회사 그냥 그만두면 될 거 아냐’라는 힐난 또한 과로자살을 대하는 흔한 태도 중 하나다. 하지만 그만둠을 근성 없음, 부적응자 등의 표지로 간주하는 사회의 인식, “그만둬도 갈 데가 없고, 어딜 가나 똑같다”는 자조의 감정은 자살을 마지막 탈출구로 선택하게 만든다.

과로자살을 개인 탓, 개인의 선택으로 돌리는 논리는 문제가 발생하는 구조를 은폐하고 재생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기 책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죽음을 유발하는 일터의 문제는 사라지고 만다. 과로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런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왜 그만두지 않았을까’가 아니라 ‘망인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을까?’ ‘무엇에 대한 분노였을까?’ ‘남겨진 우리에게 보내려 한 신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느덧 당연시되고 있는 ‘과로+성과 체제’를 낯설게 바라보고 거리를 두는 감각과 감수성을 기르는 것, ‘시간의 민주화’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과로자살, 한국서 더 두드러져”

지은이 김영선 연구위원 인터뷰

<존버씨의 죽음>의 지은이인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은 우리 사회 과로 문화의 실태와 문제점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온 연구자다. <과로 사회>(2013년)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2018년) 등을 썼다. 다음은 지난 12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 내용이다.

―과거 발전주의 시대와 현재 신자유주의 시대 과로의 양상을 구별했는데.

“주로 장시간 노동을 통해 ‘갈아넣고 쥐어짜는’ 방식이 20세기식 과로였다면, 성과주의와 괴롭힘을 통해 ‘태우는’ 방식이 21세기식이다.”

―과로자살이 최근 더 증가하고 있다고 보나?

“그렇다. 과로자살은 신자유주의 시대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한국에서 더 두드러진다. 정확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최근 몇년 사이 과로자살, 직장 내 괴롭힘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개선되고 있는 측면은 없나?

“과로자살이 언론 등을 통해 이슈화되면 책임자 사과와 개선 방안 발표 등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모두 선언적인 형태에 그쳤다. 과로사 방지법 제정 등을 통해 과로사를 제도적 차원에서 방지하고 집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정착돼야 한다.”

―52시간제 도입 등을 통해 노동시간 자체는 다소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공기업, 정규직 등의 부문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특별연장근로 사업장과 예외 업종 등 사각지대가 많다. 시간 차원의 양극화가 발생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등의 발언을 했다.

“윤 후보만의 기이한 발언이 아니다. 노동시간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 사항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고 내면 깊이 각인돼 있다. 노동자 친화적이 아닌 자본 친화적인 담론이다. 이런 사고가 개인 건강뿐 아니라 사회적 건강도 훼손한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 안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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