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꼭꼭 숨어라, 대통령 기록물 보일라

곽수근 여론독자부 차장 2022. 1. 14.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5만6938건. 지난달 31일 대통령기록관이 공개한 2021년도(2020년 생산분) 대통령 기록물 생산 건수다. 개정 대통령기록물법에 대통령 기록물 생산 현황을 공고하도록 의무화한 규정이 신설돼 내놓은 집계다. 이 가운데 대통령비서실장 직속실(1만5536건)과 국가안보실(6408건) 등 청와대에서 업무 관리 시스템으로 생산한 대통령 기록물이 2만8270건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2020년만큼 매년 생산됐다고 가정하면 문재인 정부 5년 임기 동안 대통령기록물은 78만여 건에 이를 전망이다.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이 지난 12월 14일 세종시 대통령기록전시관 4층에 새롭게 단장해 공개한 '대통령의 역할' 전시실 모습. 기록관 측은 전시실 전면 개편을 통해 629건의 문서, 사진, 영상 등 전시기록물을 확충하고 대통령 역할에 대한 의미를 재조명했다고 밝혔다. 2021.12.14/연합뉴스

대통령 기록물은 대통령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 생산된 기록물과 물품이다. 다른 공공 기록물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고 비밀 기록물도 많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4월 27일 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건넨 USB도 대통령 기록물에 포함된다. 이 USB에 북한 원전 건설 관련 내용이 담겼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그 안에 원전 관련 내용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USB에 담긴 내용은 국가 기밀이라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통령 지정 기록물’로 정해지면 열람이 허용되지 않고, 자료 제출 요구에도 불응할 수 있어 사실상 봉인(封印)된다. 지정 기록물은 대통령이 정하고, 보호 기간은 최장 15년(사생활 관련은 30년)이다.

학계에선 문재인 대통령 임기를 3개월여 남긴 요즘, 청와대가 대통령 기록물 분류와 이관에 관해 고심하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혐의를 비롯해 향후 문제가 커질 만한 사건과 관련된 대통령 기록물이 상당수 생산돼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클 것이라는 얘기다. 임기가 끝나기 전에 대통령 지정 기록물로 지정해 비공개되도록 보호 장치를 하든지 아예 존재를 확인할 수 없도록 조치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정 기록물로 정해졌을 경우엔 나중에라도 국회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 의결이나 고등법원의 영장 발부로 예외적으로 열람할 수 있는 계기를 기대할 수 있지만, 슬그머니 숨길 경우에는 존재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폐기하는 경우도 있다.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여부가 논란이 됐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초본 삭제가 그 예다.

앞서 2008년 논란이 된 ‘이지원(e-知園) 불법 유출’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 대통령 기록물 76만9000여 건을 복제한 저장 장치와 서버 등을 봉하마을로 가져간 사건이다. 삭제된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의 수정본은 봉하마을의 이지원에선 복구됐다. 노 전 대통령 퇴임 당시 비서실장으로 기록물 이관 등을 총괄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사초(史草) 실종’ 논란의 중심이 됐던 이유다.

2019년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하는 2022년 5월 개관을 목표로 총 172억원의 예산을 들이는 문재인 대통령기록관 설립을 추진했다. 본지 취재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께서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밝혔다. 정부가 부지 매입비까지 예산안에 편성한 사안을 대통령이 몰랐고, 원하지도 않았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2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문재인 대통령기록관을 추진했던 청와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인사 중에 책임지고 물러난 이는 없다. 오히려 당시 대통령기록관장은 임기가 2년이나 남았는데 지난해 국가기록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대통령기록관장 자리에는 친정부 인사가 들어와 5년 임기를 새로 시작했다. 알 박기 인사로 임기 말 대통령 기록물 관리를 위해 포석을 깐 셈이다. 어떤 기록을 얼마나 어떻게 숨길 것인가.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