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매혹적인가, 황정민의 '惡'
가느다란 조명 아래 등받이가 긴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나머지는 텅 빈 어둠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등이 굽은 남자가 불편하게 절름거리며 걸어나온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절대적 악인 리차드3세(황정민). 객석을 향해 히죽거리면서 그가 말한다.
“날 봐. 좋은 핏줄로 태어났지만 거칠게 만들어졌지. 아무렇게나 찍어낸 듯 뒤틀린 모습. 나는 이 순간부터 훌륭한 배우가 되겠어. 때론 웃으면서 때론 동정의 눈물도 흘리면서 유쾌하게 엄격하게 사랑스럽게 또 마초적으로. 세상을 속일 명연기로도 내가 저 왕좌를 차지할 수 없다면, 그럼 조금 더, 더 악해지면 되겠지.”
연극 ‘리차드3세’(한아름 각색·서재형 연출)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했다. 말재주와 꾀, 권력욕으로 몸의 불구를 뛰어넘는 악마의 이야기다. 리차드는 흉한 소문을 창작해 큰형 에드워드 왕과 작은형 조지가 서로를 증오하게 만든다. 형제를 찢어놓고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조카 둘을 살해한다. 자신이 목숨을 빼앗은 남자의 여자에게 청혼할 정도로 악인 중의 악인이다.
그런데 매력적이다. 배우 황정민이 음험한 세계를 기초부터 잘 축조했기 때문이겠지만, 리차드는 인물 자체만으로도 탐구욕을 부른다. 악인도 돋보일 수 있는 시대라서일까. ‘일그러진 욕망’이 밀도 있게 표현된 연극을 보면서 관객은 집중했고 여러 번 웃음이 번졌다. 좋은 연극은 ‘이렇게 살라’ 훈계하지 않고 ‘저렇게 살아도 되나’ 반문하게 한다. ‘리차드3세’는 500여 년 전 이야기지만 오늘을 돌아보게 해 현대적이다. 관객은 구석진 곳에 구겨져 있던 한 인간의 화려한 비상을 무섭게 목격한다.
황정민은 구부정한 몸으로 삐딱하게 걸어도 권력욕과 정욕이 넘치는 리차드를 다층적으로 연기했다. 결핍과 충만, 절망과 환희, 분노와 연민 등 진폭이 큰 감정들을 스위치 바꾸듯 자연스럽게 건너간다. 배우는 영화와 달리 관객을 마주하며 호흡하는 연극 연기의 장점을 살리면서 무대를 장악했다. 엘리자베스(장영남)를 향해 “당신이 왕비가 되기 전에 나는 왕의 적들을 잡초처럼 뽑아내며 피를 흘렸다” “지금은 악을 택하고 선을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고 외칠 때는 욕망의 뿌리가 만져졌다.
1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황정민은 “학창 시절에는 선배들이 자주 고전을 공연한 덕에 보고 다니면서 그 힘을 느꼈는데 최근에는 그럴 기회가 적어 내가 직접 올린 것”이라며 “‘리차드3세’는 주인공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주는 매력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황정민만의 포인트를 묻자 “빨간 얼굴이다. 땀도 많이 흘려 분장해도 금방 지워진다”며 웃었다. 연출가 서재형은 “리차드의 악함을 칭찬하진 않지만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합리성이 있다”고 했다.
각색과 연출이 탄탄해 러닝타임 100분이 금방 간다. 사형 집행 등 몇몇 장면에서 영상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깊이가 28m에 이르는 무대를 꽁꽁 숨겼다가 보여줄 땐 그 어둠의 두께 앞에 아득해진다. 피로 얻은 것은 피로 잃게 된다. 리차드가 죽인 망자들이 그의 꿈속으로 쳐들어오는 마지막 전투, 객석을 향해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묻는 엔딩도 가슴을 쿵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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