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째 새 공장 못 짓는 반도체 강국

용인/이벌찬 기자 2022. 1.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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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 용인공장 부지… 규제 등에 막혀 착공도 못해

13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 예정지인 이곳엔 수백 개의 현수막이 도로를 따라 빼곡히 붙어 있었다. ‘SK 들어오지 말라’ ‘(우리는) 고향을 빼앗겼다, SK는 무엇을 내주었는가’ ‘약속 없는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 추진 반대’ 등 보상을 요구하는 주민들이 내건 것이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자는 “반도체 클러스터 짓겠다고 발표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첫 삽도 못 떴다”고 했다.

황량한 하이닉스 공장 부지 - 13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의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예정 부지가 텅 비어 있다. 2019년 2월 사업 계획이 발표됐지만 정부 심의 통과에만 2년이 걸렸고, 다섯 차례나 착공 시기가 연기됐다. /장련성 기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SK하이닉스와 협력사 등이 414만8000㎡(126만평) 부지에 차세대 메모리 생산 기지를 짓는 사업이다. 10년간 12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4곳을 지을 계획이었다. 원래 작년 1월 착공할 계획이었지만 다섯 차례나 연기됐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수도권 공장 총량제의 예외 사례로 인정하는 정부 심의에만 2년이 걸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비(非)수도권 지방자치단체 눈치를 살피느라 결정을 계속 미뤘고, 지역 국회의원들까지 반발하면서 시간만 보냈다”고 했다. 인근 지자체에서 환경 영향 등을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시 6개월 이상이 소모됐다. 산업부 차관을 지낸 우태희 대한상의 부회장은 “1980년대 한 일본 관료가 ‘우린 반도체 공장 짓는 데 2년이 걸리는데 한국은 6개월마다 새 공장을 지으니 경쟁이 되겠느냐’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며 “불합리한 규제가 많아지면서 지금 우리가 반도체 공장 하나 짓는 데 4년이 걸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반도체 강국 코리아’를 이끄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정작 안방에서는 ‘찬밥 대우’를 받고 있다. 지난 1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반도체 특별법’(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도 ‘대기업에 혜택을 주면 뒷말이 나온다’ ‘수도권에 투자가 쏠리면 지방이 소외된다’는 정치 논리에 밀리며 반쪽짜리 법으로 통과됐다. 반도체 기업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반도체 인재 육성, 세제 혜택 확대는 법안에서 삭제되거나 대폭 축소됐다.

반도체특별법 제정 작업에 참여한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 기술학회장(한양대 교수)은 “법안 초안을 만들 때 반도체 업계의 27부문, 43가지 규제 완화를 건의했는데, 통과된 최종안에는 포함된 게 거의 없다”고 했다. R&D(연구개발)을 위한 장비 규제 완화도 없었고, 세제 혜택도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도체 특별법’은 문재인 대통령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직접 지원을 약속한 법안이다. 작년 5월 문 대통령이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해 “반도체 강국을 위해 기업과 일심동체가 되겠다”고 선언했고, 여야가 모두 관련 법안을 내놓는 등 초당적 논의가 시작되는 듯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반도체 확보’를 위해 미국·중국이 패권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반도체 업계도 반색하며 인력 확보·세제 혜택 등 각종 애로 사항을 전달했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 협의 과정에서 대기업 견제, 지역 균형 개발, 통상 마찰 우려 등의 논리에 밀려 초안은 누더기가 됐고, 이마저도 결국 해를 넘겨 간신히 통과됐다.

◇수도권大 반도체 정원 확대… 균형 발전 논리에 밀려

반도체 업계의 핵심 요구는 ‘인재 육성’과 ‘세제 혜택’이었다. 국내 반도체 인력은 3만6000명(2019년 말 기준) 수준으로, 매년 고졸부터 석·박사급까지 1500여 명이 부족하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의 분석이다. 한 반도체 대기업 관계자는 “수요는 많은데 뽑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업체들은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 증대를 법에 포함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법안 논의 과정에서 제외됐다. 현행법상 수도권 대학은 ‘인구 집중 유발 시설’로 분류돼 있어 예외 적용이 불가하다는 논리였다. 비(非)수도권 지역 출신 의원들의 반발도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특성화 대학과 교육센터를 지정하는 정도만 법안에 포함하는 선에서 정리됐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끌어모아야 할 상황에 오히려 문을 닫아놓은 꼴”이라는 말이 나온다. 전기·전자 등 관련 학과 정원 규제를 피해 수도권 대학에 개설한 반도체 계약학과 학생 수도 연간 150명으로 필요 인력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을 맡고있는 이종호 교수(전기정보공학부)는 “반도체 계약 학과도 정규가 아닌 임시 학과이기 때문에 교수와 기자재가 부족한 상태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세제 혜택도 줄어… “국내 투자하면 오히려 마이너스”

기업 투자를 촉진할 세제 혜택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국내에 시설 투자를 하면 25%에서 최대 50%의 세제 혜택을 달라고 했지만, 최종 법안에선 최대 20%에 그쳤다. 특히 투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은 기본 6%에 전년보다 투자가 늘었을 때 주어지는 추가 공제(4%)까지 포함해도 최대 10%다. 이마저도 2024년 말까지 투자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3년짜리 한시 조항이다. 또 올해는 반도체 세금 감면액 총액을 8800억원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치권이 세액공제가 대기업에 대한 특헤라는 말이 나올 것을 우려해 세제 혜택을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선 제발 반도체 공장 투자를 해달라고 지자체들이 엄청난 경쟁을 펼치고 있다”면서 “국내에 투자하면 오히려 손해인 난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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