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 옆 폐교에 '백남준 거북이'..바다 절경과 절묘한 조화

노형석 2022. 1. 1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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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립미술관 개관전 가보니
울산 대왕암공원 인근 옛 울산교육연수원 강당에 전시된 백남준의 1993년 작 <거북>. 166개의 티브이모니터를 이어붙여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전자영상 조각이다.

거장 백남준의 ‘거북이’가 안착한 곳은 울산 대왕암 바닷가였다.

울산 하면 떠오르는 거대 공단과 조선소의 도크 공간이 아니다. 눈부신 하늘 아래 동해의 파도가 밀려와 드르륵드르륵 자갈돌 구르는 소리를 들려주는 대자연과 맞닿은 무대다. 울창한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해돋이의 명소 대왕암과 자갈밭 해변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옛 방어진중학교 폐교 강당이 안식처가 됐다. 그런데 기획자는 이런 절경을 볼 수 있는 건물 창마다 암막 커튼을 치고 빛을 차단했다. 해저의 심연처럼 어둑어둑해진 강당 바닥에 1993년 백남준이 만든 10m 길이의 전자 거북이가 엎드려 있었다. 166개의 티브이모니터를 이어붙여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이 전자영상 조각의 모니터에선 헤엄치는 거북이와 푸른 하늘, 숫자와 갖가지 꽃들의 이미지들이 컬러 동영상으로 흘러나왔다. 온몸에서 빛을 내는 거북이는 동해의 파도를 헤쳐나가며 미디어아트를 퍼뜨릴 꿈을 꾸고 있을까.

울산시립미술관 실감 미디어아트 체험 전용관(XR 랩)에서 열리고 있는 ‘블랙 앤드 라이트: 알도 탐벨리니’전의 영상 전시 모습. 예술가, 기술자, 학자 등 다양한 지식인들의 협업 공간이자 실험적인 아트플랫폼을 표방한 이 공간은 국내 공공미술관 최초로 설치된 미디어아트 전용관이다.

지난 6일 개관한 울산시립미술관(관장 서진석)은 대왕암 해변의 놀라운 새 명소를 한국 미술판에 알렸다. 주소는 울산광역시 동구 등대로 95번지. 옛 방어진중학교의 폐교 건물 교사동과 강당에서 국내외 미디어아트 대가들의 소장품 29점을 선보이는 ‘찬란한 날들’전과 울산에 연고가 있는 청년 작가 24명의 작품전 ‘대면-대면 2021’이 개관 특별전으로 열렸다. 백남준의 전자거북을 비롯해 미디어아트의 최고 거장으로 추앙받는 페터 바이벨, 인도의 대가 날리니 말라니, 중국의 스타 작가 쑹둥, 한국의 스타 작가 이불, 미디어아트 대표 작가 이용백과 문경원·전준호의 신구 수작들이 본관 교실과 강당 공간을 촘촘하게 채웠다.

일렁이는 바다가 폐교의 유리창에 비치는 가운데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와 국제 미술전, 국내 메이저 갤러리나 미술관 등에서 선보였던 대가들의 작업이 옛 교실 공간마다 들어차 있는, 믿기지 않는 장면들이 잇따라 눈가를 지나간다. 20~30년 사이 가장 뛰어난 미디어아트 수작들을 영상으로 실감 나게 보고 그 옆 창으로는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바다의 절경을 보는 감상 기행은 세계 어느 미술관에서도 누리기가 쉽지 않은 특전이다. 이렇게 색다른 전시 구성은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와 백남준아트센터의 수장을 지내며 미디어아트 전시 기획과 국내외 작가들의 세계적 네트워크 구축에 진력해온 서 관장의 내공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미술관 1호 소장품 전자거북을 바닷가 폐교 안으로 가져와 건물 바깥에 바로 잇닿은 동해 쪽으로 머리를 향하게 하고 넓은 강당 바닥 한가운데 설치한 건 회심의 한 수로 비친다. 울산은 거북과 역사적 인연이 있는 도시다. 젖줄인 태화강의 지류 대곡천 기슭에 세계적인 선사시대 암벽 회화 유적 반구대가 자리한다. 반구대란 명칭 자체가 거북이 엎드린 모양의 대란 뜻을 지녔으니 개관 전시의 얼굴로 전자 테크놀로지와 생태성, 신화성이 결합된 백남준의 전자거북을 내세운 건 절묘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울산시립미술관 본관과 따로 특별전이 펼쳐진 대왕암공원 옛 방어진중학교 건물 일대의 풍경. 이곳에서 국내외 미디어아트 대가들의 소장품 29점을 선보이는 ‘찬란한 날들’전과 울산에 연고가 있는 청년 작가 24명의 작품전 ‘대면-대면 2021’이 열리고 있다.

현대중공업 조선소 공장 두 공업지구 사이에 끼어 있지만 풍광이 빼어난 대왕암 바닷가의 폐교 공간은 미국 캘리포니아 말리부 해변의 게티 빌라 뮤지엄, 덴마크 루이지애나 뮤지엄, 일본 나오시마 뮤지엄에 뒤지지 않는 최적의 바다 미술관 터로 지목된다. 동해의 빼어난 풍광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미술 명소로 부각될 만한 잠재력이 크다는 평가다. 관광리조트로 개발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한 지역민들과 지자체를 설득해 바다와 어우러진 전용 미술관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조언들이 미술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지난 6일 낮 열린 울산시립미술관 개관식 모습. 여러 층의 길쭉한 단으로 이뤄진 미술관 앞에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축사를 마친 뒤 내방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중구 북정동에 연면적 1만2770㎡, 지하 3층·지상 2층 규모로 신축된 미술관 본관은 미디어아트 중심의 ‘미래형 미술관’이다. 가가건축사무소 대표 안용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은 처마가 길쭉한 콘크리트 단 3개가 계단처럼 겹쳐 올라가면서 야외 테라스를 만들고 내부 공간을 구성하는 얼개로, 주요 전시장은 모두 지하에 있다. 울산읍성의 핵심인 관아 건물과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숙소로 쓰였던 객사 사이에서 두 영역을 현대미술 공간으로 잇는다는 콘셉트로 지어졌다. 전시실 바깥 테라스로 나와 바라다본 울산 도심부 모습은 미래파 작가들이 광폭한 상상력을 발휘해 부려놓은 초현실적 풍광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사또가 행차하고 주재하던 동헌과 도호부, 객사 터의 전통 가옥 건물들과 60~70년대 가옥들이 뒤섞여 있고, 멀리 고층 아파트와 고층 빌딩들이 비죽비죽 솟았다. 이 초현실적 풍경을 테라스에서 보는 것부터가 감상이다. 테크놀로지와 기계문명이 빚어낸 급속성장 도시 울산에 미디어아트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대왕암공원 인근 옛 울산교육연수원 건물 안에 차려진 개관 특별전 ‘찬란한 날들’에 출품된 인도의 미디어아트 대가 날리니 말라니의 대형 영상설치작품 <내 목소리가 들리니?>의 한 장면.
울산시립미술관 지하 2층 ‘포스트네이처…’전 전시장에 설치된 세계적 거장 히토 슈타이얼의 대형 영상설치작품 <이것은 미래다>의 일부분. 공사현장 가설 비계에 설치해놓은 스크린 속에서 디지털 식물이 자란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디지털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상을 성찰한다.

지하 2층 1·2전시장에서는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라는 동시대 미디어아티스트들의 주요 작품들을 망라한 특별전이, 지하 1층의 실감 미디어아트 체험 전용관(XR랩)에서는 백남준과 함께 미디어아트의 신기원을 열었던 이탈리아 작가 알도 탐벨리니의 회고전 ‘블랙 앤드 라이트’전이 열리고 있다. 지하 1층의 엑스아르랩은 국내 공공미술관 최초로 설치된 미디어아트 전용관이다. ‘포스트 네이처’전은 히토 슈타이얼, 슈리칭, 정보, 알렉산드라 피리치, 고이즈미 메이로, 카미유 앙로 등 현재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미디어아티스트들의 주요 작품들이 망라된 비엔날레급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보여준다. 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공사장 비계에 달린 독특한 얼개로 호평받았던 히토 슈타이얼의 디지털 식물 영상설치물과 201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당시 옛 공회당의 역사적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던 알렉산드라 피리치의 퍼포먼스 설치물 근작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애호가들을 매혹했다. 전시공간이 산만하다거나 세부적인 연출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울산 옛 관아 자리에 세워진 새 미술관 지하에서 시공을 초월하는 미디어아트의 테크놀로지와 소통, 비판의식을 엿보는 데는 부족함이 별로 없었다. 대왕암의 미디어아트 잔치와 더불어 국내 미술판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시각예술의 별천지가 펼쳐진 셈이다. 관람 인원은 개관 일주일도 안 돼 1만명을 돌파했다. 지자체 미술관으로서는 초유의 신기록이다. 미디어아트에 생소한 대중과의 소통 강화와 관람 서비스 확충이 현안으로 남았다. 주요 전시는 4월까지 이어진다.

울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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