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보지 않기: 돈룩업과 탈진실 [인스피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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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넷플릭스 영화 <돈룩업>이 이슈가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거대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것을 발견하고 정부와 대중에게 위험성을 알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정치적 판단으로 “위를 보지 마(Don’t look up)”를 외치죠.
<돈룩업> 속 혜성은 우선 기후재앙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간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기후위기를 예고해왔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기간 수차례 기후위기가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2019년 파리 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했고 이듬해 미국은 실제로 탈퇴했죠. 트럼프 지지자들은 기후위기가 헛소리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지난달 29일 기후과학자 피터 칼무스는 <돈룩업>을 보고나서 자신의 트위터에 “기후과학자들 가운데서도 내 목소리는 가장 급진적이고 돈룩업 속 과학자와 유사하다. 나는 애원하고 저주하고 약한 모습을 보인다. 내 손끝은 꿋꿋이 혜성을 가리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나는 대중매체로부터 외면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나아가 <돈룩업>을 기후재앙 뿐 아니라 탈진실 시대, 위기에 빠진 공론장에 대한 비유로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문학자 랜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토크쇼에서 울부짖듯 외칩니다. “우리는 다 죽을거라고요!...지금 이 말도 안듣겠죠. 왜냐면 각자의 정치적 입장이 있으니까!”
‘탈진실(post-truth)’이란 합의된 진실 혹은 그 가능성을 거부하고 다들 자기만의 껍질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전문가도, 정부도, 언론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것은 ‘자신’ 뿐입니다. “지구가 둥글다고요? 그건 정부와 NASA가 퍼뜨린 음모예요.” “기후위기는 ‘기후양치기’들이 돈 벌려는 수작이죠.” “혜성이 지구로 오고있다는 건 전문가의 의견일 뿐이고요. 내 생각은 달라요.”
우리는 어떻게 다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레터에선 리 매킨타이어의 <과학부정론자들과 대화하는 법>과 다큐멘터리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조너선 라우시의 <지식의 헌법> 등을 지팡이 삼아 탈진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면지구론자’들의 세계
지구가 둥글다는 건 누구에게나 ‘상식’으로 여겨지죠. 이는 누군가가 지구가 둥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거나, 전문가들이 둥근 지구라는 이념을 우리에게 ‘세뇌’시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과학자들의 실험에 의해 진실이라고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과학부정론자들과 대화하는 법How to Talk to a Science Denier>에서 이런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암울한 현상황을 짚고 있습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학부정론자들을 방치한다면 공동체에 큰 위험이 닥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과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는 과학부정론자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면지구론자Flat-earther’들을 꼽습니다. 평면지구론자들은 ‘원형지구론자Globalist’들에 반대해 지구가 평평하다는 ‘진실’을 주장하는 이들인데요. 저자는 평면지구론이 “자기의 생각에 맞는 증거만 취사선택하는 것을 통해 수립되는 ‘의도된 사고’의 가장 완벽한 예”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2018년에 직접 평면지구 컨퍼런스에 가서 이들의 말을 직접 듣는데요. 이들은 놀랍게도 공통적으로 자신이 진실을 숨기려는 절대다수의 세력(제도권, 정부, 학계, 전문가, 언론 등)에 의해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평면지구론은 쉽사리 또 다른 음모론의 시작점이 되곤 했다. 그(평면지구론 컨퍼런스 참가자)는 ‘둥근 지구’에 대한 의심이 곧 NASA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배우지 못했죠. 단지 무엇을 생각하느냐를 배웠을 뿐이예요” 그는 스스로가 세뇌당했다고 느꼈고, 수중 불소론 역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강화하게 된 계기였다. 이곳의 연사들은 종종 매트릭스의 ‘빨간 약’ 장면을 인용했고, 대중들은 이에 웅성이며 동의를 표했다. 모두가 그 영화를 좋아하는 듯했다. 그들은 그들이 오로지 진실을 아는 사람이고, 그들은 ‘다른 이들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Lee McIntyre, <How to Talk to a Science Denier>(이하 동일)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이런 사고의 흐름이 딱히 평면지구론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평면지구론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에도 등장합니다. “평면 지구론자들의 판단은 경험에 의존하는 거죠. 내가 평평한 수평선을 봤던 ‘경험’이요.” “우리가 과학을 짓밟고 있죠. 평면지구 이론을 반박할 자신이 없으니까 상대를 안하는거예요”
평면지구론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정부, 언론, 전문가들은 모두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는 비겁한 이들’이고, 그들은 빨간 약을 먹은 용감한 네오입니다. 이들의 목표는 “독단적 신념으로부터 자유롭고 진정한 과학적 발견을 좇는” 것입니다.
매킨타이어가 평탄지구론자들의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 이유는 백신 무용론자, 기후위기 반대론자 등도 ‘과학적 태도’를 부정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킨타이어는 앞서 <과학적 태도>에서 과학적 사고 방식의 핵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반증하는 증거에 맞닥뜨렸을 때 기꺼이 자신의 이론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는 태도”를 꼽았는데요. 즉 그에 따르면 과학적 사고의 기본은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경우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기’ 입니다. 반면 평면지구론자, 기후반대론자 등 ‘과학반대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이들의 주장이 과학적 진실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비교적 온건한 과학반대자들의 경우에도 많은 전문가들의 합의를 이끌어낸 과학적 진실을 자신의 생각과 ‘동등한 의견’ 취급합니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실과 입증되지 않은 주장을 나란히 두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해버리는 것이죠. 조 피에르 UCLA 심리학 교수는 말합니다.
“(인터넷에서 그럴듯한 가짜 정보들을 보다보면)1명의 물리학자의 의견이든, 물리학자 20명의 의견이든, 자신과 맞먹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과학반대론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공동체에 닥쳐오는 명백한 위기를 무시할 뿐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매킨타이어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백신 반대론자들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백신 반대론자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릴 뿐아니라 공동체 역시 위기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반박의 여지 없는 100% 완벽한 과학 이론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부정론자들은 주기적으로 과학의 불확실성을 저격한다”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무조건 완벽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오직 평생 어떠한 과학도 해보지 않은 이들 뿐이다. 우리는 종종 불가능한 기준에 집착하는 과학부정주의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백신이 100%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혹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다른 더 많은 증거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려보는 게 어때요?” “흡연과 폐암 간의 연결을 밝히는 상관관계는 한번도 결정적으로 확증된 적이 없지 않나요.” 등이다. 앞서 논의했듯, 이것은 회의주의가 아닐 뿐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의도된 (과학)부정주의다. 그들이 믿고 싶지 않아하는 정보가 설령 널리 합의된 실증적인 증거들을 등에 업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귀납적 추론의 본질 상, 모든 과학적 이론엔 반드시 얼마간의 불확실성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증거가 언제든 기존의 이론을 보완하거나 혹은 심지어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과학의 기본 원리를 내다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과학에 수학 혹은 연역 추론과 같은 수준의 명백한 입증과 확실성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과학부정론자들은 아주 미세한 의혹을 침소봉대해 거기에 ‘논란’이 있는 것처럼 호도한다. 실제로는 논란 거리조차 아닌데 말이다.
저자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부정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을 얼간이 취급하며 무시할 것이 아니라요. 이는 이 책의 제목이 <과학부정론자들과 대화하는 법>이란 것과도 연결이 되어있는데요. 대화를 하기 위해선 일단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평면지구론자들이 황당한 과학부정론자인 동시에 대부분 삶에서 9.11 등 강력한 트라우마를 겪거나 음모론 커뮤니티에 속함으로써 자기 효능감과 소속감을 갖는 ‘인간’이라는 점을 사려깊게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팩트 폭격”하려는 태도는 이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들과의 대화는 가능하고 꼭 필요합니다. 그들과 우리는 한배에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회의주의)은 사태의 진상이 어떠한지를 인식할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반실재론적’ 신조는 무엇이 참, 거짓인지 결정하기 위해 사심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트리고, 심지어 객관적 탐구라는 개념이 이해가능한 개념이란 믿음을 약화시킨다[...]다른 어떤 것에 확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류로 드러났다고 가정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은 확정적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옳은 기술과 틀린 기술이 모두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해리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탈진실의 시대에 진실찾기
먼지 하나 없이 새하얀 방에 작은 공이 하나 놓여 있다고 상상해봅니다. 만약 우리가 이걸 깔고 앉거나 숨기는 게 불가능하다면 이 공을 감추는 가장 간편하고 훌륭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이 공과 비슷한 모양의 공을 수백개 와르르 쏟아놓는 것일 겁니다.
진실을 감추고 싶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진실과 비슷한 것을 꾸며내서 ‘논란’으로 만들거나, 무엇이 참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진실을 감추는 탁월한 전략’에 대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수석 전략가 스티브 배넌은 “민주당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반대 세력은 미디어죠. 그리고 그들을 다루는 방법은 그 일대를 거짓말로 범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진실을 “엉뚱한 주장들의 불협화음 속에서 익사시키는” 것입니다.(??링크)
리 매킨타이어가 ‘과학적 태도’를 이야기했다면, 조너선 라우시는 <지식의 헌법>에서 과학적 태도를 포함하는 지식의 헌법을 이야기합니다.
제목인 ‘지식의 헌법’은 헌법처럼 지식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본 약속을 말하는데요. 조너선 라우시는 이 책에서 지식의 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설명하는 지식의 헌법을 간추리자면,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아무리 불편한 의견이라도 공론장에서 쫓아내지 말기
2.공론장에서 검증된 이론을 헛소리와 ‘동등’하게 놓지 말기
백 사람의 생각은 한 사람의 생각보다 낫습니다. 1번 항목의 이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류 지적 가능성’에 열려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 검증 네트워크를 통해 한층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죠. 라우시는 이러한 ‘과학적 사고의 네트워크’를 진실 추구를 위한 핵심 방법으로 꼽습니다. 누군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아예 공론장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할 경우 결과적으로 다양성을 헤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저자는 이 책에서 ‘캔슬 컬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캔슬 컬처란 사회적으로 문제있는 행동이나 말을 한 인물을 ‘조리돌림’함으로써 그를 아예 사회에서 몰아내는 것인데요. 이 책에는 ‘인종초월주의’를 옹호하는(“성전환자의 결정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듯 인종전환자 개인의 결정도 받아들여야 한다”) 논문을 썼다가 SNS에서 비난당하고 수백명의 학자들로부터 논문 철회 요구를 받은 철학자 레베카 투벨이 등장하는데요. 그는 자신을 향한 비판의 대부분이 논문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난색을 표했습니다.
사람들이 오직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는 사회에선 서로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조차 지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자는 공격받았다는 느낌 혹은 불편함을 이유로 표현을 가로막는 ‘감정적 안전주의’가 다양한 의견을 억누르는 무차별적 검열 기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과학에서도 살펴봤듯 논쟁은 화나게 하고 인신공격을 하고 감정적 상처를 줄 수 있다[...]그것(지식의 헌법)은 어느 정도의 감정적 타박상을 받아들일 것을 우리한테 요구한다. 낯이 두꺼워질 것을 요구한다[...]감정적 안전주의는 다원주의를 약화시킨다. 다양성은 본래 불편하며 가끔 감정적으로 안전하지 않을 때도 있다. 지식의 헌법의 천재성은 우리가-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보통은 고상한 방식으로- 낯설고 달갑지 않은 생각과 부딪치고 그것과 경합을 벌이고 우리의 생각과 그것을 비교하도록 강요한다는 데 있다. -조너선 라우시, <지식의 헌법>
저자는 다양성을 위한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며 19~20세기 흑인인권운동의 역사를 되짚습니다. 당시 흑인들의 주장은 백인 기득권층에게 ‘모욕적’이며 ‘지나치게 폭력적’ ‘공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자 노력해온 이들 덕분에 결국 평등을 외친 이들의 목소리는 살아남았고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만약 흑인들의 주장이 지나치게 공격적이라는 이유로 발언권 자체가 무시되었다면 지금같은 세상은 오지 않았겠죠.
물론 소수자 인권을 주장하는 목소리와 소수자를 차별하는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공격적일 수 있다는 이유’로 동등하게 놓을 순 없습니다. 다만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사회가 어떤 발언을 강력하게 금지할수록 다른 목소리를 내려는 시도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브라운대학의 총장이자 아이비리그 대학 최초의 흑인 총장인 루스 시먼스는 2001년 학위 수여식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표현의 자유를 실천해 여러분의 인간성을 모욕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자유의 대가는 이런 견해의 표명을 허용하는 것임을 이해하라고 여러분에게 요구하고자 합니다[...]가장 좋은 상태에서 배운다는 것은 안락의 반대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발견의 과정이 우리를 기분 좋고 안전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공론장에서 어떤 의견이든 말할 권리가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 곧 모든 의견들이 동등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적어도 어떤 의견이든 공론장에 올라올 (올라와서 망신당하거나 혹은 인정받거나 할) 기회는 주어야한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지구가 평평하다!”라고 말할 권리는 있어야하지만, 제대로 된 과학적 상호 검증이 작동하는 공론장에선 금세 외면당하고 말겁니다.
이처럼 공론장에 모인 다양한 의견들 중엔 사려깊은 검증 과정을 통해 살아남은 의견들이 있겠죠.
그렇다면 이 이런 의견을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의견과 동등하게 놓지 말아야 합니다. 2번 항목(“공론장에서 검증된 이론을 헛소리와 ‘동등’하게 놓지 말기”)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만약 이 약속이 없다면 마치 기껏 쌀 속에서 모래를 열심히 골라놓고 마지막에 모래를 다시 섞는 거나 마찬가지겠죠.
저자는 이런 과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도가 뒷받침되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아무리 ‘논의할 가치가 없는 주장을 무시하자’고 외쳐도 여전히 자극적인 먹이가 돈을 만드는 미디어 생태계에선 이런 주장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원형지구론자들이 어떻게 성실하고 과학적으로 지구는 둥글다는 진실을 입증해가는지는 대체로 지루하지만, 평면지구론자들의 이야기는 꽤 흥미진진하거든요.)
개개인의 노력 외에도 엉터리 주장을 걸러내고 의견의 다양성을 지켜가기 위한 사회적, 제도적 지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진실이 바지를 입기도 전에 거짓은 지구 저편까지 가있다.” -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트루스>
■맺음말
다큐멘터리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에서 특히 제 눈길을 끌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평면지구론자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안에서도 다양한 ‘학설(돔학설 등)’과 분파가 생겨나기 시작하는데요. 그중 어떤 평면지구론자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평면지구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를 시도합니다. 그는 고가의 자이로스코프를 준비해 지구가 ‘자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는데, 두번의 실험이 모두 지구의 자전을 입증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죠. 그러자 그는 다른 변수를 제어한 위대한 세번째 실험을 예고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단호한 표정에선 다소 망설임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나의 믿음을 버려야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인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야말로 매킨타이어가 정의하는 ‘과학의 태도’입니다.
<돈룩업>에서 ‘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지구가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위를 바라보라는 사람들’과 ‘돈룩업’을 외치는 사람들이 결국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죠.
오늘 레터에서 다루었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위기에서 구원해주는 것은 결국 ‘대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의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기후가 몇년간 실제로 얼마나 올랐는지 등의 ‘과학적 수치’보다도 ‘과학적 태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가 보고싶은 것만 취사선택하지 않고, 서로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설득하는 것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위한 장을 만들어가려는 노력 말이죠.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더 나은 진실을 찾아가고자하는 과학적 태도-지식의 헌법만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전체주의 통치의 이상적인 대상은 투철한 나치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의 구분,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1월 12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추가로 읽을만한 책과 글 소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글로 하나의 깊은 영감을 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 주세요. 혹시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7426)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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