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스페셜 에디션

한겨레 2022. 1. 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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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아침부터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구매창이 열리는 일본 사이트의 카운트다운을 기다렸다.

오직 100개만 선착순으로 풀리는 한정판 키보드 키캡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귀한 것이라고 알아주는 좁은 키보드 커뮤니티 안에서의 구매 인증(다른 말로 자랑)이 뒤따르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헛헛한 욕망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범인에 가까운 나로서는 실제로 한정판이기에 맛본 쾌감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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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이것이 지난 5일 필자가 득템한 한정판 키보드 키캡이다. 일본의 PFU사에서 만든 순백색의 \

[삶의 창] 정대건 | 소설가·영화감독

지난 5일, 아침부터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구매창이 열리는 일본 사이트의 카운트다운을 기다렸다. 오직 100개만 선착순으로 풀리는 한정판 키보드 키캡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키캡이라 하면 키보드가 아니라 타자 입력을 위해 손가락으로 누르는 부위(뚜껑)를 말한다.

일본과 한국과 서양, 전세계의 키보드 마니아들과 경쟁해야 했고, 1분도 안 돼 품절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런 종류의 클릭 경쟁에서 매번 결제창조차 가지 못하거나 결제 중에 실패했기에 뭔가 나만 모르는 다른 방법이 있나 의심을 하곤 했다. 빠른 결제를 위해 일본 사이트를 번역해주는 브라우저에 배송대행 주소와 개인정보와 카드정보가 미리 자동완성되도록 연습해가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정시가 되기 1분 전부터 나는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댔다. 그리고 정각이 되기 30초 전쯤 결제 사이트가 열렸다.(이래서 내가 매번 놓쳤구나!) 결제창에 들어간 것에 쾌재를 부르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신규 카드의 첫 결제를 위한 등록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문자확인 번호를 입력하고 그다음에는 에이아르에스(ARS) 전화까지 걸어야 했다. 다 망쳐버렸다고 자책했다. 내 실수로 놓쳤다고 생각하니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결제에 성공했다! 예상대로 1분도 되지 않아 품절되었다. 전세계에 100개밖에 없는 한정판, 그것을 해내다니 감개무량해지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사실 기존의 키캡과 기능상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상시 판매하는 기존 제품과 한정판의 사진을 내 주변에 보여주며 물어보니 8할이 기존 제품이 더 예쁘다고 했다. 심지어 나도 미적인 기준으로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기존 제품을 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절망하고 또 기뻐했을까. 그것이 한정판이라는 것, 누군가는 간절하게 원했고 얻지 못해 부러워한다는 것, 어쩌면 내가 놓치고 안타까워했을 그것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노트북과 연결한 전세계 100개 한정판 키캡의 은은한 모습. 일반 키보드의 키캡과 기능상의 차이는 없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내 기쁨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무용하게 여기는 쪽에 가까웠다. 주변에서 귀한 한정판이라고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는 소비라고 생각하니 감흥이 줄어들었다. 이것이 귀한 것이라고 알아주는 좁은 키보드 커뮤니티 안에서의 구매 인증(다른 말로 자랑)이 뒤따르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헛헛한 욕망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는 항상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가운데 영혼의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아타락시아)를 행복으로 보았고 자족적 행복을 추구했다. 이들의 시선으로는 내가 얻은 행복이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1분 동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체험한 나는 카드 결제 소동 때문에 지극한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얻었기에 큰 쾌감을 누린 것도 사실이다. 범인에 가까운 나로서는 실제로 한정판이기에 맛본 쾌감을 부정할 수 없다.

한정판의 행복, 여기에서 행복의 비결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고유한 것, 대체재가 없는 것은 귀한 것이다. 연인은 남들과는 나누지 않는 애정표현을 나누기 때문에 귀하고,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생명은 대체할 수 없기에 귀하다.(그래서 근래 접한 돈 때문에 생명을 잃었다는 뉴스들이 안타깝다.) 어느 해부턴가 매번 돌아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게 그저 또 한살 먹었구나 싶어 심드렁해졌다. 코로나로 인해 영 특별한 느낌이 나지 않는 새해를 두번이나 보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관점을 다르게 본다면 매해가 돌아오지 않고 다시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스페셜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2022년 한해는 한정판처럼 귀하게 여기면서 대체할 수 없는 한해를 만들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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