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칼럼] 21세기 자본의 정치경제학-피케티와 그 이후

한겨레 2022. 1. 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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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천 칼럼]무엇이 문제인가. 세계는 혼돈에 빠졌고 할 일은 많다. 무엇보다 자산 불평등과 불로소득 체제에 대안을 내며 모두의 안정된 살림살이, 자연과 공존하는 실체적 거주경제(폴라니) 재생의 길로 가는 데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이병천 |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불평등, 저성장, 기후위기가 맞물린 최악의 악순환 늪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삶의 위태로운 모습이다. 약자를 희생시키며 인간과 인간을 다층적으로 갈라놓은 불평등 상황에 대해 진검승부하는 해법을 내지 못하면 전환의 정치는 공염불이 된다. 소득 불평등도 물론 문제지만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부의 불평등이다.

토마 피케티 등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작성한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상위 10%의 소득은 전세계 소득의 52%를 차지했는데 하위 50%의 소득은 전체의 8%였다. 하지만 부의 경우, 상위 10% 부자가 전체 부의 76%를 소유한 반면, 하위 50%는 겨우 전체의 2%를 차지했다. 한국은 소득 수준에서는 서유럽만큼 부유해졌으나(한국은 당당한 선진국이다) 불평등 상황은 서유럽보다 한층 열악하다(한국은 부끄러운 후진국이다). 부의 경우 상위 10%가 전체의 58.5%를, 하위 50%가 전체의 5.6%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의 경우 상위 10%가 46.5%를, 하위 50%가 16%를 각각 차지했다. 사회적 안전망을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채 급속히 공적 규제를 완화한 결과 이처럼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세계 불평등 보고서는 자산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보다 한층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것, 단지 격차가 아니라 계층 상승 기회가 막힌 불평등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들의 소득 수준과 불평등 정도는 별로 상관관계가 없음을 일러준다. 포장을 바꾼 또 다른 성장주의나 낙수효과 전략으로는 오늘의 불평등 극복 과제를 감당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누진세 등 자산 평등화를 위한 획기적 대안이 절실하다는 결론이다. 이러함에도 2022년 대선 국면의 한국에서 시대착오적 극우 선동과 혐오놀이에 빠진 보수 야당 후보는 물론 집권 여당 후보까지 부동산 부자감세 공약을 쏟아내며 뒷걸음질 경쟁이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불평등이 시대 화두로 부상하면서 치솟는 집값과 주거 불안에 떨며 대중의 살림살이가 고통받는데도, 안전규제 부실로 불안정 노동자들이 줄이어 죽어나가는데도 가진 자들의 큰 목소리, 이들과 손잡은 파당적 계급정치가 상황을 호도한다. 그리고 규제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로 ‘혁신성장’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미래 먹거리를 만들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거나 불평등, 불공정을 참고 견디면 분배도 개선되기 마련이라거나 심지어 불평등은 능력 또는 기여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등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기득권 자본의 지배를 은폐하는 각종 변호론이 무성하다. 이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장벽을 뚫고 불평등을 글로벌 토론 무대로 올리는 데 피케티의 공은 지대하다.

<21세기 자본>에서 피케티는 자본이 어떻게 변신해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 불로소득자 지배 불평등 사회가 득세하는지, 일종의 자본운동의 변증법에 대해 말한다. 초창기 자본은 위험감수적이고 기업가적이다. 하지만 축적이 진행되다 모종의 임계점을 지나면 불로소득자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윤 주도의 기업가적 자본주의에서 노동과 상관없이 자산 소유, 상속 부에서 수익을 챙기는 지대 주도의 세습적 불로소득자 자본주의로 퇴행하고 불평등이 심화된다. 이것이 자본의 본성과 변신을 보는 피케티의 인식이다. 그런데 그는 이 변신동학의 기초에 r(자본수익률)>g(경제성장률) 부등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는 r와 g의 시소게임에 초점을 맞추고 대담하게 r>g가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라고 역설했다.

‘불로소득자는 민주주의의 적’이라면서 피케티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 기술적 합리성은 민주적 합리성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너무 흔히 후자가 전자로부터 마술처럼 저절로 파생될 거라고 가정해왔다. 하지만 실질적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이루려면 단지 시장이나 의회 및 기타 형식적 민주주의 제도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특정한 제도들이 필요하다.”

피케티가 오로지 자산 불평등에만 집중해 오늘의 불평등 문제를 진단한 건 아니다. 심각한 불평등은 불로소득자 사회(rentier society, 국역본에는 자본소득자 사회로 번역), 즉 상속 부가 매우 중요해진 초자산세습 자본주의를 통해 나타나는가 하면, 또 시이오(CEO)를 극도로 우대하는 슈퍼능력주의 사회를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뒤메닐과 레비 같은 학자는 신자유주의 체제란 자본 소유자 계급과 관리자 계급의 새로운 타협 위에 민중을 배제하는 체제라고 파악한 바 있다. 여하튼 불평등의 시공간적 정치경제학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두개의 불평등 논리가 결합되어 작동하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피케티의 논지다. 이는 자산 불평등과 능력 불평등이 어떻게 얽혀 복합적 불평등 체제와 계급 구조, 계급 갈등을 연출하는지 보려 할 때 귀중한 시사점을 준다. 그가 <자본과 이데올로기>라는 후속 저서를 낸 것도 이와 연결된다.

피케티 논쟁이 일어났고 새 연구도 진전됐다. 무엇이 문제인가. 피케티가 들고나온 r>g 부등식은 매력적이지만 과연 이게 자본주의의 경향 법칙이 될 수 있겠는가. 자본의 변신과 불평등 동학을 설명할 때 자본과 노동이 가진 힘의 불균형 등 사회 세력들의 협상력 차이 및 제도 변화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 빈약한 게 아닌가. 자본과 노동 간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크다고 주장하는데 금시초문이다(서머스). 생산적 자본과 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뭉뚱그린 총량적 자본 개념은 허술하다(스티글리츠). 피케티에게는 케인스의 세계가 없다. r>g 부등식이 성립해도 그게 불평등 심화를 설명하지는 못한다(스톡해머). 크리스토퍼스는 자산 소유와 시장지배에 따른 불로소득 추구를 함께 봐야 한다면서 그 다양한 양태를 파고든다. <21세기 자본>이 사회적 관계와 권력으로서 자본 동학을 연구한 게 아니고 자본권력이 만들어내는 인위적 희소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은 매우 근본적이다(하비).

따가운 비판들 앞에 피케티도 적지 않이 물러선 듯하다. 21세기 자본의 정치경제학은 갈 길이 한참 멀다. 피케티 이후 허구적 불로소득 자본과 생산적 기능 자본의 변증법을 탐구하는 일이 벅찬 공부거리가 됐다. 자본주의 비판의 사상사도 새롭게 돌아봐야 한다. 특히 프루동이 불로소득자의 착취와 생산 자본의 노동착취, 코먼스인 자연(토지, 물)의 사유화 등 삼중모순을 비판하고 여기에 상호성에 기반한 사회의 집합적 능력을 대치시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세계는 혼돈에 빠졌고 할 일은 많다. 무엇보다 자산 불평등과 불로소득 체제에 대안을 내며 모두의 안정된 살림살이, 자연과 공존하는 실체적 거주경제(폴라니) 재생의 길로 가는 데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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