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수다] 이세영 "인생 가늘고 길게, 그러나 주체적으로"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어느 분야든 경력은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이다. 특정 한 분야에서 20년 넘게 경력을 쌓은 사람에게는, 뭐든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신뢰감이 생긴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오랜 연기 경력이 뒷받침된 배우들 대부분은 어떤 역할을 맡든 안정적으로 해내곤 한다. 그 긴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기에, 치열하게 고민하며 연기 내공을 다져왔기에, 경력에 비례하는 값진 연기력을 갖춘다.
아역배우로 데뷔한 이세영은 이제 갓 30세가 됐는데 연기 경력이 무려 25년이다. 그녀의 탄탄한 연기력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사랑스러웠던 민효원, 의학드라마 '의사요한'에서 섬세한 감정연기가 돋보였던 강시영, 장르물인 '카이로스'에서 고군분투하던 한애리 등, 이세영은 장르를 불문하고 맡는 역할마다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그 가운데 이세영과 사극의 앙상블은 가장 눈부셨다. 2019년 tvN '왕이 된 남자'와 2021년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의 연이은 성공으로, 이세영은 당당히 '사극 퀸'의 자리에 올랐다. 이세영의 모든 것은 사극에 안성맞춤이었다. 반듯한 이마와 콧날, 크고 맑은 눈은 사극의 쪽진 머리에도 빛나는 비주얼을 완성했고, 남다른 발성과 발음,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감정을 표현하는 섬세한 연기로 사극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연기력을 발휘했다. 이제 이세영표 사극은 하나의 '믿고 보는' 장르가 됐다.
이세영은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 이산(이준호 분)이 사랑한 궁녀 덕임을 연기했다.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그렇다면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란 물음에서 시작한 이 작품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이산을 마음에 품고도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덕임 캐릭터가 이해 받기 위해서는 이를 연기하는 이세영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다. 이세영은 온갖 역경을 딛고 진정한 왕으로 성장하는 왕세손 이산의 곁을 든든하게 지킨 궁녀 덕임으로서, 애틋한 사랑의 감정과 자신의 주체적인 인생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결국 덕임이 이산의 후궁이 되며 결실을 맺은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다움을 선사했지만, 궁 안에 얽매여 자유를 잃고 초점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덕임의 빈 눈동자는 날개가 꺾인 새처럼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세영은 오롯이 덕임으로 분해, 캐릭터의 희로애락을 안방극장에 고스란히 전달했다.
왕의 승은을 거절할지라도 계속 궁녀로 남아 자유롭게 살고 싶어한 덕임처럼, 이세영도 가늘고 길게, 또 주체적으로 사는 인생을 꿈꿨다. 그러면서 거창한 목표를 갖기보단, 배우로서 밥값을 해내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서일까. 막 30대에 접어든 이세영은 작은 행복의 소중함을 알았고, 주어진 것에 책임감을 가질 줄 아는 배우였다.
▲ '옷소매 붉은 끝동'이 MBC 드라마 중에선 2년 만에 두 자릿수 시청률을 돌파하며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았어요. 작품을 끝낸 소감이 어떤가요?
7개월이란 긴 시간동안 많은 분들, 제작진, 배우들 모두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 이상으로 따뜻한 사랑을 받아 너무 행복해요. 종영해서 아쉽기도 하지만, 끝까지 잘 마무리를 해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 하는 사극마다 잘 돼서, '사극 퀸'으로 불리고 있어요. 본인이 사극 연기에 강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런 수식어는, 너무 과분하고 과찬이죠. 말씀만으로 행복하고 감사한데, 이번에 큰 사랑을 받아서 앞으로 사극을 하게 된다면, 그땐 부담을 느낄 거 같아요.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만의 강점은 잘 모르겠어요. 이번 작품이 더 반응이 있었던 건 원작이 훌륭했고, 그에 못지않게 대본도 재미있었고, 대선배님들과 훌륭한 배우들이 있었고, 서로 연기합도 잘 맞고 케미가 좋아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란 질문에서 시작된 작품인데요. 이세영 배우는 덕임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기했나요?
제가 원래 인물이 능동적으로 뭘 얻어내기 위해 싸우는 것에 끌려 하는데, 이번 작품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궁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꼈어요. 신분과 지위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에 제약이 따르는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이 아이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사실 대본에도 덕임의 마음이 완전히 명확하게 나오는 부분은 한 번도 없어요. 마지막에 덕임이 죽으면서 산에게 했던 '아직도 모르십니까, 정녕 내키지 않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멀리 달아났을 겁니다'라는 말을 제외하면, 마음을 드러내지 않죠. 덕임의 마음을 궁금해 할 수 있도록 연기를 해야 했는데, 그렇다고 '궁녀가 왕을 사랑하지 않았다' 라고 느껴지게 표현하고 싶진 않았어요. 명확하진 않아도, 덕임이는 산이를 연모했으나 현실적인 부분들 때문에 드러나는 아픔과 쓸쓸함, 처연함을 표현하려 노력했어요. '사랑했다, 그러나 잃을 게 많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다'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 말로는 표현하지 않으면서 산을 연모하는 덕임의 서사를 눈빛이나 표정으로만 드러낸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저 스스로가 정리가 안됐다면, 많이 복잡하고 어려웠을 거예요. 대략적으로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기에, 어디 쯤에서 덕임이 산을 연모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는지, 그런 감정의 변화를 정해놓고 연기했어요. 그러면서도 너무 명확하게 좋아하는걸 드러나지 않도록 했고요. 15부쯤에서 눈빛으로 '말할 수 없지만 내가 당신을 연모합니다', '하지만 거절할 수 밖에 없는 날 이해해주세요', '내가 당신을 잡을 수 없지만, 날 놓지는 말아요' 그런 마음을 어렵지만 연기하려 했어요.
▲ 덕임이는 굉장히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이 이전의 사극 속 여성들과는 달랐는데요. 자기 삶의 결정권, 자유가 사라질 것을 걱정하며 왕의 승은마저 거절했어요.
덕임이는 굉장히 주체적이지만, 큰 사건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가늘고 길게 가고 싶어했어요. 물론 어쩔 수 없이 휘말리긴 하지만, 그냥 친구들이랑 자유롭게 놀고, 궁인들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자기 일을 해나가는, 소박하지만 능동적인 친구였죠. 그동안 사극에서 자기가 권력을 쥐려 하고, 승은을 입고 올라가려 하는 여성을 다룬 경우는 많았지만, 소박하게 가늘고 길게 가고 싶어하는 여성을 다루진 않았던 거 같아요. 드라마 초반에 덕임이 자기 생활에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모습들을 역동적으로 연출하려 했어요. 그러다 후반부에 덕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무력감, 그래서 더 슬플 수 있도록 연기하려 했죠.
▲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었던 덕임과 실제 이세영 배우의 싱크로율은 얼마나 되나요?
인생을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하고 자유를 갈망한다는 건 공통점 같아요. 초반의 생동감 있는 덕임의 모습과는 95% 정도 비슷해요. 덕임이가 저보다 더 주체적인데, 그 부분은 제가 덕임이한테 배워야 할 점이라 생각하고요. 차이점은, 제가 덕임이에 비해서는 가진 게 많다는 거? 거기에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 생각해요.
▲ 이산 역 이준호 배우와의 로맨스 케미가 너무 좋아 '산덕커플'이 시청자에게 큰 사랑을 받았죠. 연말 연기대상에서 '베스트커플상'도 수상했고요. 파트너로서 이준호 배우는 어땠나요?
아무래도 로맨스 케미는 남자주인공이 멋있고 사랑꾼일수록 시청자가 사랑해주시는 거 같아요. 이건 전적으로, 남자답게 멋있는 왕의 역할을 너무 잘 소화한 이준호 씨의 공이 아닌가 싶어요. 일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좋고, 허물없이 친하다 보니 그 시너지가 배가 된 거 같아요. 원래부터 연기도 잘하고 신뢰하는 배우였는데, 너무 멋있고 매력있는 산이를 그 이상으로 소화해준 이준호 씨한테 감사해요.
▲ '옷소매 붉은 끝동' 마지막 회에서 산이와 덕임이 서로 만둣국을 알콩달콩 떠먹여주는 장면은 애드립이란 게 고스란히 느껴진 신이었어요. 촬영 분위기는 어땠나요?
만둣국 장면은 '옷소매 붉은 끝동'의 촬영 마지막 날, 맨 마지막에 찍은 신이었어요. 조금 들뜨면서도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는데, 대본상으로는 덕임이가 죽은 후에 덕임을 그리워하는 산이의 회상에서 나온 장면이라 특별히 두 사람이 더 반짝반짝 빛나고 행복해 보이길 바랐어요. 원래는 간단히 대사를 치고 만둣국을 먹으며 끝나는 건데, 준호 씨와 자연스럽게 애드립을 주고 받았던, 제가 웃음을 참으며 했던 말들이 다 방송에 나갔더라고요.
▲ 이세영 배우가 마지막에 산과 덕임의 뜨거운 19금 장면이 있을 거라 예고했는데, 생각보다 소소(?)하게 지나가 아쉽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뜨거운 19금 장면 예고는, 좀 더 큰 관심과 기대를 위한 멘트였어요.(웃음) 사실 대본상에는 산이가 덕임의 어깨 뒤에 새겨진 '명(明)' 글자에 키스하고 옷고름을 푸르고 속적삼을 벗기는, 굉장히 파격적인 내용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그 전의 키스신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그 이상을 표현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차라리 새벽에 일어나 덕임이 보고 있을 때 산이가 깨어나 다시 한 번 키스하는 장면을 넣자는 의견에 그렇게 장면이 만들어졌어요. 아쉬워하는 팬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장면이 잘 나왔다고 생각해요.
▲ '옷소매 붉은 끝동' 최종회가 시청률 17.4%를 돌파하며, 시청률 15%를 넘길 경우 하겠다고 약속했던 공약을 이행하게 됐는데요. 이준호 배우는 곤룡포를 입고 '우리집' 댄스를, 이세영 배우는 '진또배기'를 공약으로 걸었었죠.
시청률 목표 15%는 '공약 이행을 안하겠다' 정도의 수치라 생각했는데, 그걸 돌파해서 너무 감사해요. 당연히 공약 이행을 해야죠. 하지만 제가 공약으로 걸었던 '진또배기'는 시청자가 사랑해준 덕임이의 여운을 깰 수 있는, 경솔했던 발언이지 않나 싶어요. 스스로 반성하고 있어요. 절충해서, '우리집' 안무를 당의를 입고 우아하게 추는 것으로 보여드리려고요.
▲ 덕임과 함께 궁녀생활을 한 '궁녀즈' 하율리, 이은샘, 이민지 배우와의 호흡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궁녀즈는 덕임에게 그리고 이세영 배우에게 어떤 존재였나요?
덕임에게 궁녀즈가 그랬던 것처럼, 실제 제게도 세 사람은 궁녀즈 같은 존재예요. 이 인연이 너무 소중해요. 운 좋게 또래끼리 만났고, 그 사람들이 다 보석처럼 좋은 사람들이었죠. 이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 드라마 촬영이 끝나기 전에 클라이밍 동호회를 만들어 3~4주에 한 번씩 꾸준히 만나자고 약속했어요.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라면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같이 배워보고 시간을 공유하며 즐겁게 살아보자는 마음으로요. 궁녀즈는 제게 소중한 인연이고 가족 같은 사람들이에요.
▲ 1997년에 데뷔하고, 어느덧 데뷔 25년차인데요. 너무 어릴 적에 진로를 정해버려 아쉬운 마음은 없는지요?
아쉬운 마음은 없어요. 제가 하고싶은 다른 일이 생긴다면, 언제가 되든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가 절 고용해줄 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전 또래 친구들에 비해 빨리 진로를 결정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에요. 만약에 또 다른 꿈이 생긴다면 그거에 열중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지금은 연기를 평생 꾸준히 하고 싶어요.
▲ 데뷔 이래로 매년 쉼없이 작품을 해오고 있는데, 그렇게 연기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모든 직업군의 모든 분들이 휴일 빼곤 일하며 살잖아요? 저도 이게 제 일이니까, 계속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축구를 보며 최근에 느낀 건데, 명문구단에서 교체선수로 있으면서 경기를 못 뛰는 것보단, 계속 경기를 뛰어야 자기 기량이 줄지않고 다시 올라갈 기회도 오는 거 같아요. 제 일은 연기인데, 물론 좋은 작품을 골라서 하는 것도 좋겠지만, 끊임없이 하는 게 소모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계속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게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 덕임이처럼 자기 일에 단단한 신념이 있는 거 같은데요. 배우로서 가진 나름의 소신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소신이라 할 건 없고, 그냥 연기를 잘하고 싶어요. 무책임하지 않고, 예전에 수상소감으로 말한 적도 있는데 밥값 이상을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선배님들을 보면 자기 연기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을 많이 아우르시더라고요. 그걸 보며 제 것만 해서는 안된다는 걸 느꼈어요. 앞으로도 제 본업을 잘 하려 해요. 물론 제 삶도 잘 영위해야 하고요.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 이번 '옷소매 붉은 끝동'의 대성공이 감사하지만, 동시에 부담감으로 작용할 것 같아요. 다음 작품을 향한 마음가짐은 어떤가요?
연기하는 모든 작품, 모든 인물에 똑같은 마음으로 임하지만, 비슷한 반응이 나오지는 않아요. 이번엔 폭발적인 반응이 따라와 다른 작품보다 남다른 각별함이 있긴 해요. 그러나 다음 작품을 하게 된다면, 전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부담감보단, 이번 작품은 선물이였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선물을 매번 받을 순 없으니, 크게 기대는 안해요. 제가 열심히 하면 언젠가 또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 할 거에요. 다음 작품은, 또 다시 선물을 받기 위해서라기 보단, 내가 이 작품, 이 인물을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메시지가 뭔가, 이런 걸 생각해야죠. 제가 성인이 된 후에는 늘 '믿고 보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제가 하는 작품이라면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재미있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 그런 배우가 되는 게 제 목표예요.
[사진제공=프레인TPC]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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