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갑을 쥐어짠다, 스크루플레이션 공포

곽창렬 기자 2022. 1. 1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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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월급은 천천히, 물가는 빨리 오른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사는 회사원 김모(39)씨는 작년 하반기부터 장을 볼 때면 숨이 막힌다. 돼지고기, 우유 등 반드시 사야 하는 물건 몇 개만 담았는데도 3만원이 훌쩍 넘기 때문이다. 김씨는 “비슷한 물건을 살 때 작년 초만 해도 2만원대를 지출했는데 최근 들어 물가가 너무 많이 오른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스크루플레이션(Screwflation)’ 그림자가 주요국을 덮치고 있다. 스크루플레이션은 ‘쥐어짜다’라는 뜻의 ‘스크루(screw)’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쳐 만든 용어로, 임금보다 물가가 더 빨리 올라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는 현상을 뜻한다. 고소득층보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더 큰 타격을 입히기 때문에 빈부 격차를 확대하는 주범으로도 꼽힌다.

스크루플레이션

◇중산층 쥐어짜는 스크루플레이션

스크루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인 2011년 무렵 생겼다. 금융 위기로 중산층 이하 가구의 일자리가 크게 타격을 받으면서 미국 가구의 중위 소득(소득 순위에 따라 나열했을 때 중간에 해당하는 금액)은 2007년 4만9600달러에서 2010년 4만5800달러로 8% 감소했다. 반면 물가는 2009년을 제외하고 꾸준히 상승했다. 이에 따라 가구 실질 소득이 큰 폭으로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세인트루이스 연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가격으로 환산한 미국 가계의 실질 소득은 2007년 6만2865달러에서 2012년 5만7623달러로 하락했다.

여기에 자산 가격 하락까지 겹쳐 중산층의 고통은 배가됐다. 2007~2010년 기간 미국 가구의 중위 자산은 12만6400달러에서 7만7000달러로 40% 급감했다. 반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소득 상위 7% 가구의 순자산은 28%나 늘었다. 경기 부양을 위해 연준이 뿌린 유동성이 대부분 주식시장으로 흘러가면서 주식을 보유한 부유층과 그렇지 못한 중산층 사이의 자산 격차가 확대된 것이다. 이에 미국 헤지펀드 시브리즈파트너스 대표인 더글러스 카스는 당시 배런스닷컴에 기고한 칼럼에서 “중산층의 실질 임금은 답보 상태인 반면 치솟는 식량과 에너지 가격이 중산층을 쥐어 짜는 스크루플레이션이 나타나고 있다”며 “스태그플레이션보다도 위험하고 해결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10년 만에 재등장한 스크루플레이션 공포

2012년 이후 물가 상승률이 낮게 유지되고 가계의 실질 소득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스크루플레이션 공포는 잠잠해졌다. 그러다 최근 물가가 급등하며 스크루플레이션이라는 용어가 10년 만에 재등장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높은 물가 때문에 중산층 이하 계층이 고통받으면서 유행했던 단어가 최근 미국의 경제와 금융 상황 때문에 다시 오르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미국 경제 상황은 당시와 유사한 점이 많다. 지난해 12월 미국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31.31달러로 전년(29.91달러)보다 4.7% 증가했다. 그런데 같은 달 소비자물가는 전년보다 7.0% 오르면서 미국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오히려 깎였다.

특히 중산층 살림살이에 영향을 끼치는 물가가 상대적으로 더 올랐다. 작년 12월 기준으로 에너지 관련 물가는 전년보다 29.3%나 올랐고, 이 가운데 석유 가격은 1년 전보다 49.6% 급등했다. 중산층의 삶과 밀접한 중고차·트럭 값이 37.3%, 신차 가격도 11.8%나 상승했다. 식음료(5.0%), 육류·생선·계란(12.5%) 등 식료품 가격이 크게 오른 것도 서민층에 타격이다. 미국 CNBC는 “물가 상승으로 중산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며 “경제학자들이 인플레이션이 초래할 불평등에 대해 경고하고 나섰다”고 전했다.

연준 의장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10년 전과 비슷하다. 당시 중앙은행 수장이었던 벤 버냉키 의장은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과감하게 유동성을 살포했는데, 기대했던 경기 회복은 미흡한 반면 자산 양극화만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았다. 제롬 파월 현 의장은 물가 급등 조짐이 뚜렷한데도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라고 버티다 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측과 달리 물가가 7%대를 바라보게 되자 연준은 뒤늦게 양적 긴축 등 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급격한 정책 선회 때문에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스크루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재차 유행할 것인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인물은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유럽도 물가>임금, 한국은 그나마 나은 편

미국 외 주요국도 비슷한 처지다.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영국은 11월 임금 인상률이 4.7%로 결코 낮지 않았지만, 물가는 무려 5.1% 오르며 1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독일 역시 12월 물가가 5.3% 오르는 등 실질 임금 상승률이 제로(0) 수준으로 떨어졌다. 화가 난 독일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려 달라는 시위에 나서자 새로 출범한 독일 정부는 최저임금을 22%가량 올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물가 상승률이 임금 인상률보다 각각 2.5%, 3.1%포인트 높았다.

한국은 물가 상승률이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낮아 실질 임금이 마이너스(-)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의 물가 상승이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에 더 큰 타격을 입힌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험연구원이 2020년 1월부터 작년 9월까지 계층별 물가 상승률을 분석한 결과, 고소득층(소득 상위 20%)이 느끼는 물가 상승률은 2.66%인 반면 저소득층(하위 20%)은 3.6%였다. 저소득층에 영향이 큰 ‘식료품·비주류음료’ 물가가 11.6%나 오른 반면, 고소득층 지출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교육’ 물가는 오히려 2.37% 떨어진 영향이 컸다. 오건영 신한은행 투자상품서비스본부 부부장은 “높은 가계 부채와 주거 비용으로 힘겨운 상황에서 물가와 금리까지 오르면 중산층과 서민층의 삶이 더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며 “이로 인해 소비가 둔화되면서 전체 경기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스크루플레이션(screwflation)

쥐어짠다는 의미의 ‘스크루(screw)’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말. 물가는 상승하는데, 경기는 침체되고, 임금도 제자리에 머무르면서 중산층의 가계 살림살이가 쥐어짜일 정도로 나빠지는 경제 현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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