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비효율' 보다 '보행권'..늘어나는 횡단보도의 의미 [김보미의 도시&이슈]

김보미 기자 입력 2022. 1. 13. 14:23 수정 2022. 1. 1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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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역 앞 사거리에 대각선 횡단보도가 놓여 있다. | 서울시 제공


무단횡단을 뜻하는 영어 ‘제이워킹’(jaywalking)은 직역하면 ‘시골 촌뜨기처럼 걷는다’는 뜻이다. 20세기 초반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사람들이 길을 걸어서 건너는 행동을 조롱거리로 만들려고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업체들의 전략은 제대로 먹혔고, 도로는 자동차의 주행이 인간의 보행보다 우선시 되는 공간이 됐다.

이후 100년 가까이 이어졌던 자동차 우위의 도시 철학에 균열이 생긴 건 역설적으로 차들이 거리를 더욱 점령하면서다. 찻길 위 고가도로를 놓아 통행량을 늘리고, 육교를 설치해 보행자도 분리했지만 사고와 체증, 소음, 대기오염, 주차난은 가중될 뿐이었다. 차 중심의 환경이 도심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정책은 전환점을 맞았다.

서울시가 13일 밝힌 2022년 안전한 보행 환경 조성 계획을 보면, 시내 31개 횡단보도가 연내 추가로 생긴다. 지난해에도 서울시는 횡단보도 28개를 새로 설치했다. 이 중 절반은 보행자가 길을 ‘X’자로 건널 수 있는 대각선 횡단보도다.

서울시는 2021년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에 대각선 횡단보도(왼쪽)와 영등포구 서강대교 남단에 ‘ㅁ’ 자로 횡단보도를 새로 만들었다. 보행자가 멀리 돌아가지 않고도 도로를 건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서울시 제공


‘ㄴ’자로 한 번, ‘ㄱ’자로 한 번, 총 2번의 신호를 받아야 건너던 사거리를 한 번에 가로지를 수 있도록 한 이 횡단보도는 ‘스크램블 교차로’ ‘X자 횡단’ 등으로 불린다. 일시적으로 사람과 자동차가 도로에서 완전히 분리되도록 신호를 주기 때문에 보행자 안전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194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유동량이 많은 도심에서 차와 사람이 충돌하는 사고가 잦아지는 걸 해결하려고 도입된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동시 신호가 차량의 흐름을 막는 게 당시에는 심각한 문제였다. 운전자 편의를 저해한다는 이유로 다시 일반 신호로 되돌리기도 했다. 한 번의 신호에 최대 3000명이 길을 건너는 진풍경으로 유명해진 일본 도쿄의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역시 1973년 처음 설치될 때는 시민들의 이동 편리성이나 보행자 안전 확보 차원은 아니었다. 신호 대기자들이 너무 많아 차도에까지 넘치는 불편을 해소하는 수단이었다. 1968년 구마모토 시내에 생긴 일본의 첫 ‘X’자 횡단보도도 차량과 사람이 뒤엉킨 흐름을 일시적으로 분리해서 정체를 풀기 위한 장치였다.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시부야역 앞에 설치된 스크램블 교차로. 보행 신호 1회 당 최대 3000명이 한꺼번에 길을 건넌다. 출처|도쿄도 공식 관광 페이지(GOTOKYO)


교통 정책 측면에서 큰 공감을 얻지 못했던 대각선 횡단보도는 ‘도로’가 자동차보다 보행권을 보호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형성되면서 다시 부각된다. 대전발전연구원이 대전 시내 대각선 횡단보도가 있는 교차로와 없는 인근 교차로를 비교한 결과(2013년 기준) ‘X’자로 건널 수 있는 곳이 횡단 중 사고가 36% 적었다. 중상 이상의 사고도 24% 덜 발생했다. 특히 어린이 보호구역의 경우 사방으로 길을 건널 수 있을 때 보행 중 사고가 51%나 적게 일어났다. 우회전 차량이 많은 사거리는 대각선 횡단보도가 생기면 적색신호에 우회전이 금지돼 사고를 줄여준다.

교차로의 ‘ㄴ’자 혹은 ‘ㄷ’ 횡단보도(왼쪽)를 ‘ㅁ’형이나 대각선 횡당보도로 바꾸면 건너갈 수 없던 부분까지 보행이 가능해진다. | 서울시 제공


대각선 횡단보도는 도심에서 차량 흐름보다는 보행자 편의와 안전을 먼저 보호하겠다는 선언 중 하나다. 서울에서 사람과 차량 통행이 밀집된 16.7㎢ 구간의 한양도성 안쪽은 보행특구로 지정된 녹색교통진흥지역이다. 유동성이 많은 만큼 어디서나 끊기지 않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교통 체계를 개선하고 있다. 대각선까지는 아니더라도 ‘ㄴ’ 또는 ‘ㄷ’자 횡단보도만 있어 건너편으로 걸어서 갈 수 없던 사거리는 최소한 ‘ㅁ’자로 횡단보도를 설치해 전 방향 횡단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육교와 고가도로가 철거하고 횡단보도로 추가로 조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폭이 8m인 횡단보도를 12~20m까지 광폭으로 넓혀 설치하거나 차 없는 거리를 도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도로 위를 가로질러 길을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는 계속 추가돼 2017년 3만4660개에서 2021년 3만7650곳으로 늘었다. 특히 보행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는 1만188개에서 1만1921개로 4년 만에 17%가 많아졌다.

1968년 9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설치된 아현고가도로(왼쪽)은 45년 만인 2014년 철거됐다. 고가 철거 후 단절됐던 신촌로~충정로 구간에는 중앙버스 승강장 6곳이 설치됐다. | 서울시 제공


2016년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200m이었던 횡단보도 최소 설치 간격이 좁은 폭의 도로에서는 100m 간격으로 줄었다. 경찰청은 횡단보도 신호 시간도 0.8m당 1초에서 0.7m당 1초로 변경해 보행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 모두 차량 통행을 지체시킬 수 있는 정책이지만 교통의 비효율보다는 보행권을 우선에 두는 것이다.

최근 도로 위 새로운 횡단보도는 광역자치단체보다 자치구 등 기초단체를 중심으로 추진하는 곳이 더 많다. 주로 학교 인근 어린이보호구역에 대각선 횡단보도 등을 논의하는데 주민들의 편의성을 높이고 도로 위 보도는 단절된 보행 경로를 이어주면 주변 상권 활성화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서울시 백호 도시교통실장은 “유동인구가 많고 보행 유발 시설이 밀집한 도심권을 시작으로 횡단보도 설치를 계속해서 확대하는 등 보행자 우선의 교통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보미 기자 bomi8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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