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보통과학자] 유전자와 생명의 이름에 숨겨진 이야기들

김우재 보통과학자 2022. 1. 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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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헌트 모건이 돌연변이 흰눈 초파리를 발견한 건, 그의 방에 들어온 연구원들이 초파리로 유전학 연구를 시작한지 2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1910년 발견된 흰눈 초파리에는 화이트(white)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모건은 이 초파리를 침대 맡에 두고 잤다고 한다. 화이트는 고전유전학이라 불리게 될 학문의 시작을 알렸고, 모건은 이후 100년이 넘게 이어질 초파리 유전학 계보의 시조가 됐다. 현재 초파리 유전학의 전통에서 연구하는 대부분의 과학자는 모건의 4대손에서 6대손에 속해 있을 것이다. 

화이트가 발견된 이후, 모건 실험실에선 특이한 돌연변이가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몸 색깔이 노랗게 변하는 돌연변이에는 옐로우(yellow)라는 이름이 붙었고, 현미경 만으로 구별이 가능한 색깔과 형태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돌연변이들이 하나씩 명명되어 갔다. 지금은 덜하지만, 초파리 유전학 연구공동체는 단 하나의 실험실에서 시작되었다는 가족공동체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모건과 그의 제자들이 뉴욕 컬럼비아대 파리방에서 만들어낸 건, 단순히 염색체에 배열된 유전자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모델생물로 과학적 문제해결에 몰두하는 연구공동체 그 자체였다. 로버트 쾰러는 《파리 대왕》이라는 과학사 저술에서 철저한 공유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초파리 연구공동체의 문화를 과학사의 특이한 사례로 다뤘다.

모건의 돌연변이 작명은 그대로 초파리 유전자의 이름으로 이어졌다. 모건과 그의 동료들이 발견한 돌연변이의 형질 중 상당수가 단 하나의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 나타나는 표현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현대 초파리 유전학자들은 모건이 발견한 화이트 돌연변이를 만드는 유전자의 결함이 초파리 염색체의 어느 부분에 존재하며, 그 유전자가 어떤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단백질을 만들며, 그 단백질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연구할 수 있다. 모건의 연구는 120년이 지난 지금도 '초파리 기지(flybase)'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현대 유전학의 연구에도 직접 응용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적이다. 유전자에 관한 한, 초파리는 우리의 지식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생물종이다. 

초파리 유전자의 이름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작명이 흔하다. 행오버(Hangover·숙취)라는 돌연변이는 알콜 저항성이 없는 돌연변이의 이름이고, 인디(Indy·I’m not dead yet)는 다른 초파리들보다 두 배 이상 오래 사는 돌연변이의 이름이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심장 없는 무쇠인간 틴맨(Tinman)의 이름은 발생과정에서 심장의 발생을 조절하는 유전자에게 주어졌고, 뇌에 구멍이 난 돌연변이에는 구멍 뚫린 스위스 치즈(Swiss cheese)라는 이름이 붙었다.  초파리 스테로이드 호르몬들 중에는 고스트(ghost·유령), 스푸크(spook·도깨비),섀도우( shadow·그림자), 슈라우드(shroud·수의), 디스엠바디드(disembodied·유체이탈), 머미(mummy·미이라), 팬텀(phantom·망령)처럼 미국 할로윈을 떠올리게 하는 유전자 이름이 많다. 이 돌연변이가 발생중인 애벌레의 외골격을 이상하게 변형시켜 유령처럼 만들기 때문이다.

《초파리의 기억》은 행동유전학을 창시한 시모어 벤저가 초파리의 행동을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하는 학문을 만들어나간 과정을 그리는 조나단 와이너의 과학교양서다. 이 책에는 초파리의 기억 능력을 연구했던 제프리 홀 등의 과학자가 등장하는데, 고전적인 기억력 돌연변이 유전자들엔 던스(dunce·멍청이), 앰니지액(amnesiac·건망증 환자)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2017년 노벨상을 수상한 생체시계 조절 유전자들의 이름은 피리어드(period·주기), 타임리스(timeless·무한한), 클록(clock·시계), 사이클(cycle·순환주기)로 기록되었다. 한국의 연구자 최준호 KAIST 교수와 임정훈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는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유전자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보고하고 그 이름을 '트웬티포(twenty-four·24)'라고 지어주었다. 초파리 유전자의 이름 중에는 한국말로 된 것도 있는데, 김창수 박사가 발견한 청각과 관련한 유전자 '난청(nanchung)'이 대표적이다. 

초파리 유전자의 작명은 모건의 화이트 ‘화이트(white)’ 돌연변이 명명법 이후 유전자 돌연변이의 표현형을 따라 짓는 전통을 따른다.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제공

인간 유전자의 이름

모든 생물학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는건 맞지만, 생쥐나 인간을 연구하는 유전학자와 초파리나 선충을 연구하는 유전학자 사이에는 문화적 괴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괴리는 유전자를 명명하는 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초파리 유전학이 1900년대에 시작된 돌연변이의 표현형 분석에서 유전자를 향해 나아간 여정이라면, 분자생물학은 DNA라는 분자가 유전정보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1940~1950년대를 거쳐, 유전자정보의 발현과정이 밝혀지는 1960~1970년대에 생화학과 유전학이 생리학이라는 전통적인 학문의 틀 안에서 융합된 여정이다. 분자생물학은 처음엔 대장균이라는 박테리아를 중심으로 유전자의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이었고, 1960~1970년대를 거치며 인간의 암세포 연구와 생쥐유전학과 빠르게 결합하며 발전해나갔다.

분자생물학의 패러다임에 익숙하지 않던 초파리 유전학이 주춤하던 이 시기에, 분자생물학은 물리학, 생화학, 유전학, 생물학, 컴퓨터과학 등등의 분야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넘어온 다양한 잡종들의 경연장으로 북적이던 최첨단 학문이었다. 특히 물리학자이던 막스 델브뤽 같은 학자들이 파지그룹을 만들며 형성한 분자생물학자들의 문화 속에서, 유전자의 이름은 초파리 유전학과는 정반대로 기능을 위주로 한 무미건조한 작명법을 탄생시켰다. 예를 들어 내가 박사과정 시절 연구하던 유전자의 이름들은 eIF4GI, TRAF2, TIA-1, hnRNPL 등의 대문자로 구성된 약어의 연속이었다. 각각의 대문자들은 해당 유전자의 기능을 설명하는 단어들로 구성된다. 즉, TRAF2는 'TNF-alpha Receptor Associated Factor 2'의 약자이며, 철저하게 해당 유전자의 기능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분자생물학자들 중에서도 유전자 작명에 위트를 발휘하고 싶은 과학자는 있는 법이라서, 2005년 미국 슬론케터링 암센터의 다케다 마에다 박사 연구팀은 생쥐에서 암유발 유전자들의 지휘자 역할을 하는 유전자를 찾아내고, 이 유전자의 기능을 나타내는 긴 영어단어들의 첫글자를 따서 유전자 이름을 포켓몬(POKEMON)이라고 지었다. 논문의 교신저자가 일본계 과학자였고, 논문이 출판된 학술지가 네이처라는 당대 최고의 학술지인데다, 당시 포켓몬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했으니, 위트 있는 작명으로 당시 모든 세계 언론이 이 논문을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포켓몬을 만든 일본의 닌텐도사는 암 유발 유전자의 이름에 포켓몬이 사용되는게 회사에 불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고, 이 유전자의 이름은 Zbtb7으로 재명명되었다. 하지만 일본계 학자들은 포켓몬이 일본의 진정한 자랑이라 여겼는지, 2008년엔 인간의 망막에서 빛정보를 신경세포의 전기신호로 변환하는 단백질에 ‘피카츄린(Pikachur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유전자의 이름은 아직 닌텐도사에 의해 이의제기를 받지 않았다. 참고로, 아직 한국의 아이돌그룹 BTS에서 유래한 유전자 이름은 없다.

인간 유전자의 명명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지자, 1957년 세계의 학자들이 모여 처음으로 유전자기호와 명명법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후 인간유전자 명명법 위원회가 만들어져, 지속적으로 명명법을 개정해나가고 있다. 기본적인 유전자와 단백질 명명법은 아래와 같다.

① 유전자 기호는 라틴어, 이탤릭체 대문자로 표기한다. 물론 이건 인간을 기준으로 한 명명법이고 생물종마다 명명법은 각기 다르다.
② 유전자 기호는 효용성을 위해 짧아야 하고, 데이터 검색에 혼란을 주면 안된다. 기존 기호와도 중복되면 안된다.
③ 논문저자는 가장 최근의 유전자 이름과 기호를 사용해야 한다.

물론 초파리 유전학계에도 명명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유전자 명명처럼 제약이 많지는 않다. 초파리 유전학과 인간 유전학 연구공동체의 문화차이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인간 유전학이 다루는 주제가 대부분 심각한 인간의 유전질환이라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인간 유전학을 연구하는 이들 중에는 의사들도 많은데, 이들은 산모나 환자를 상대로 유전자의 결함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결함이 생긴 유전자의 이름이 포켓몬이라거나 멍청이라면, 환자를 모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인간 유전자의 이름이 무미건조한 이유에도,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과학자가 자신이 속한 연구공동체의 문화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시모어 벤저는 원래 박테리오파지를 연구하던 분자생물학자였다가, 나중에 초파리 행동유전학을 만들었는데, 그의 실험실에서 발견한 생체시계 유전자들은 모두 초파리 유전학의 전통적인 표형형 명명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 실험실에서도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데스 스타(deathstar·죽음의 별)를 따서 초파리 유전자의 이름을 명명했고, 현재 논문출판을 진행 중이다. 이 유전자는 별모양으로 생긴 아교세포인 아스트로사이트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유전자 명명법위원회(HUGO Gene Nomenclature Committee) 제공

생물의 이름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치 농담이라곤 전혀 할 것 같지 않은 과학자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과학자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도 음악을 듣고 예술작품에 감탄하며, 일반 시민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이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일상세계와 분리되면서, 과학자의 작업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져버렸지만, 과학자들은 어려운 논문과 실험에 파묻혀 살면서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존재한다. 어쩌면 돌연변이와 유전자에 투영된 희한한 이름들은, 우리 곁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보통과학자들이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포켓몬 같은 작명을 통해 과학자들은 “우리도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우리에게도 인간적인 감정이 있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생물학에서 작명의 전통은 오래되었다. 생물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칼 폰 린네가 시작한 생물종의 라틴어 작명법과 '호모 사피엔스'라는 우리 종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최근 출판된 《생물의 이름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지금은 우리에게 잊혀진 자연사와 분류학의 전통에서, 생물종의 이름을 두고 벌어진 흥미로운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생각보다 인간적인 학명의 세계’로, 저자 스티븐 허드는 캐나다 뉴브런즈윅대에서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보통과학자의 평범성을 발견한다.

기독교의 창조신화에는 신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인간 아담이, 생물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등장한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유전자와 생물종에 이름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잘 알지 못한채, 과학을 이야기 없는 무미건조한 발견들로 이해하고 있다. 과학자라는 특이하고도 평범한 사람들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생물종의 이름에 새겨진 과학사의 여러 사건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초파리 유전학자의 계보도. 모건에서 시작된 전통의 전승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노란색 원은 노벨상 수상자를 의미한다. 2017년 노밸상은 표시되지 않았다.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필자소개 

김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지만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김우재 보통과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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