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레시피] 공감 형성, 리더의 학습이 먼저이다 영조에게 배운다

2022. 1. 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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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이 된 리더의 지시는 빈틈이 없다. 그리고 그 지시는 이상한 최면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바로 ‘성공에 대한 확신’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성공에 대한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 있으면 그 프로젝트의 성공률은 높아진다. 반대로 결과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자신 없는 행동은 프로젝트의 완성에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된다.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리더의 신념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화제다. 극은 궁에서의 애증, 즉 남과 여의 사랑과 연모, 실망과 한을 보여준다. 정조와 궁녀 덕임의 애틋한 감성 한편에는 후궁이 되어 평생을 군주의 사랑을 기다리는 현실에 주저하는 여인의 갈등이 담겨 있다. 또한 영조를 평생 연모했지만 그의 사랑이 친한 동료 궁녀였던 수빈 박씨에게 향하자 이를 권력의 욕망으로 채우며 영조에 대한 복수를 꾀한 제조상궁 조씨의 감정은 애증이다. 여기에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아들이 되어 기꺼이 양어머니 대신 죽음을 맞은 정 승지는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으로 받아준 한 인간, 화완옹주에 대한 의리를 지킨것으로 볼 수 있다.

극은 빠른 전개와 함께 매 화마다 사건이 벌어지고 종결을 짓는 사이다 구성으로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고 이제 그 끝을 맺었다. 특히 아이돌 출신 이준호의 연기자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 이 드라마를 시청한다는 의견도 있다. 아역 배우에서 성인 연기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이세영의 당당한 모습, 촬영, 세트, 조명은 물론이고 빌런 역할을 한 박지영의 제조상궁 역 역시 돋보였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영조 역할의 배우 이덕화이다. 매병 즉, 치매에 시달리며 세손 정조를 사도세자로 혼동하고 죽이려 하고, 시시각각 감정의 변화가 심한 연기, 그 가운데서도 군주와 세손의 할아버지로서 위치를 자각하는 모습은 극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의 단연 중심이었다.

역사에서도 영조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왕조 최고의 비극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파국을 낳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각인되었지만 그는 영민했고 백성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던 군주였다. ‘아들을 죽인’이란 곳에 방점이 찍혀 영조의 업적과 리더십이 가려져 있다는 평도 많다. 재위 50여 년 동안 영조는 국사의 모든 순위를 백성을 위한 것에 집중했다. 법 개정부터, 세제 정리 그리고 그가 평생을 추구한 탕평의 목적 또한 애민 군주로서의 온전한 노릇에 집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보여주기 위한 탁상공론에 치우치지 않고 백성의 실질적인 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조의 정치는 조선 중기 국력의 부활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 영조는 끊임없이 현장, 즉 백성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참 모습을 확인했다. 영조는 또한 공식적인 행차와 많은 미행을 통해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암행어사 제도를 활용해 자신의 정책과 정치적 이상이 궁과 한양에만 머물지 않고 지방 곳곳에 퍼져가고 있는지도 확인하고 감시했다.

작금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시만 하고 확인을 하지 않는 리더는 빠른 시간 안에 도태된다. K기업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기획실 양 이사는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임원. 해서 그는 많은 아이디어를 내며 이것의 실행을 위해 많은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장과 회장 역시 이런 양 이사를 신임하고 열심히 일하는 임원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사원들은 양 이사에게 독특한 별명을 붙였다. 바로 ‘반짝 지X탄’이다. 지시만 남발했지 중간 체크가 없는 양 이사의 결정적 단점을 근거로 생긴 별명이다. 양 이사는 하루에도 몇 번의 회의를 열고 수없이 많은 지시를 내렸다. 그때마다 부서원들은 열심히 메모하고 많은 일을 정리하기 위해 야근은 물론 휴일 특근도 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양 이사 주재의 회의에서 부서원들의 이런 모습은 사라졌다. 자신의 지시 사항이 현장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 확인하는 일을 간과하고, 문제가 보여도 이를 책임지지 않는 양 이사의 업무 스타일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양 이사가 지시를 내려도 직원들은 수첩에 적는 시늉만 할 뿐, 아무도 액션에 옮기는 부서원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별명이 순간 반짝이고 수많은 지시를 남발하는 ‘반짝 지X탄’이 된 것이다.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 차원의 과도한 지시와, 지시의 이행과 그 결과를 반드시 확인하지 않는 리더의 명령은 조직 구성원에게 아무런 구속력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영조는 아무리 몸이 좋지 않아도 늦게 일어나지 않았고 일정 시간이 되지 않으면 잠자리를 펴지 않았다. 그만큼 자기 절제가 강했다. 물론 이런 빈틈없는 자기 관리의 완벽주의 성격이 일탈을 일삼는 사도세자와의 비극을 낳기도 했지만 군주로서 영조는 타의 모범을 보이는 데 부족함도, 주저함도 없었다. 그리고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보이기 위해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한 공부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영조는 성리학의 논리로 무장한 노론과 소론의 신하들은 물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신하들을 실력으로 압도하며 이를 바탕으로 관료 조직을 통제하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틈을 보이지 않는 리더, 학습이 된 리더, 솔선수범하는 리더 앞에 반항이나 변명을 일삼는 부하들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학습이 된 리더의 지시는 빈틈이 없다. 그리고 그 지시는 이상한 최면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바로 성공 확신이다. 회사원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성공에 대한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 있으면 그 프로젝트의 성공률은 높아진다. 반대로 결과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자신 없는 행동은 프로젝트의 완성에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리더는 프로젝트의 기획 단계에서 성공과 실패의 확률을 계산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많은 부분에서 각 프로젝트별 학습을 해야 하고 참모 조직의 조언을 듣는 것이다. 상품은 기획 단계부터 시장 파악, 개발, 디자인, 원가 계산, 경쟁력, 구매 지속력, 출시 시 시장 상황 예측 등 수 많은 변수를 안고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예비 학습이 없는 리더의 결정에서 각 부서의 전력 투구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으로 단계별 대응 방안을 준비해 놓고 시작 단추를 누르는 리더의 모습은 조직에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구성원에게는 신뢰와 함께 성공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다.

▶구성원이 대립하는 조직, 리더의 인내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정치를 편 군주였다. 숙종은 태종 이래 왕실의 숙제이자 콤플렉스였던 왕후 소생의 적장자 승계 왕으로, 정통성 면에서도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하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숙종의 리더십은 환국의 정치였다. 즉 당파와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권력을 일정 기간 한 쪽에 몰아주며 다른 한 쪽은 철저히 숙청하는 이른바 ‘제로섬 게임’의 형태였다. 즉 균형과 견제의 정치가 아닌, 한 세력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다른 한 세력만 등용하는 방법으로 강한 왕권을 유지했다.

숙종의 최대 아킬레스 건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미모와 영리함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왕자를 낳았지만 투기와 당쟁의 희생양으로 죽었다. 장희빈의 아들은 숙종의 장자 경종이다. 경종은 세자 때 사약을 마시는 어머니의 비극적인 최후를 목격하고 가뜩이나 심약한 성격에 병까지 걸렸다. 경종의 동생으로 태어난 이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이다. 연잉군의 어머니는 무수리 최 씨. 무수리는 궁녀의 하녀로 궁의 계급 중에서 가장 하층이었다. 최 씨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였지만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어 연잉군을 낳았다. 연잉군은 왕자이지만 무수리 소생 서자 출신이기에 어릴 때부터 멸시를 많이 당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신분 즉, 왕의 아들이라는 정통성이 있었다. 즉 무수리 서자 출신과 왕의 아들이라는 핏줄, 이 두 가지의 부딪침이 바로 영조 80여 년을 지배하는 키워드이다.

숙종은 후계를 정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세자가 있었지만 병약하고 자손이 없는 경종의 후대까지 숙종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숙종은 연잉군을 경종의 뒤를 이을 후계 즉 ‘왕의 동생, 세제世弟’로 결정하고 노론 영수 이이명과 독대를 갖고 연잉군을 보호하라는 유지를 남긴다. 이에 소론은 이이명은 물론 숙종까지 비난하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어느덧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뒤를 이었다. 노론은 숙종의 고명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연잉군을 아들이 없는 경종의 후계를 잇는 세제로 책봉하려 했다. 당연히 소론은 반대한다. 하지만 명분에서 앞선 노론의 주장대로 연잉군은 세제로 책봉되었다. 첫 싸움은 노론의 승리로 끝났다. 소론은 반격을 시도했다. 노론에서 세제의 대리청정을 밀어붙인 것이 화근이 되었다. 소론이 ‘임금을 죽이려는 역적이 있다’고 고변했다. 경종은 친국을 열고 노론 60여 명을 잡아들였다. 노론은 소론이 왕세제 연잉군을 모함하는 것이라 주장했지만 경종은 격노하여 소론의 편을 들었다. 친국 결과 노론은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 핵심 네 명의 대신과 50여 명 관리들이 사형 당했다. 바로 신임사화이다. 정권은 소론이 장악했고 연잉군은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빠진다. 그렇게 3년 여의 시간이 흐르고 경종이 즉위 5년 만에 죽는다.

1724년 연잉군은 3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영조 시대의 개막이다. 영조는 소론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세제 때부터 자신을 보호한 노론으로 채웠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 목호룡이 ‘경종 독살설’로 영조의 정통성에 대항했다. 이들은 친국하는 영조에게 ‘당신, 나으리’라 부르며 극렬하게 저항했다. 사육신이 세조에게 대들ㅎ던 모습이 재현된 것이다. 영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런 극한적인 대립으로는 발전이 없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영조는 탕평책을 그 해결책으로 꺼냈다. 지지기반인 노론 강경파도 추방하고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했다. 그리고 영조는 “나는 노론의 임금이 아닌 백성을 위한 임금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영조의 진정성은 소론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들은 1728년 청주성에서 이인좌 등이 중심이 되어 경종의 위패를 앞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영조는 관군 지휘부에 소론파의 인물을 중용했다. 반란의 와중에 탕평의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영조는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당쟁의 폐해를 절감, 노론 강경파는 쫓아내고 소론 인물을 등용했다. 당파를 넘을 인재의 고른 등용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뜻을 신하들에게 관철시키는 통로로 경연을 활용했다. 그는 탕평을 뿌리내리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재위 52년 동안 모두 3458회의 경연이 열렸다. 이는 1년에 평균 66회, 한 달에 5회 꼴이다. 이는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공부하는 군주’였던 세종대왕을 능가하는 수치이다. 영조는 부단한 학습을 통해 경연의 본래 목적인, 신하의 임금에 대한 품위 있는 가르침의 장을 거꾸로 왕이 신하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만들어버렸다. 영조는 신하들과 논쟁을 통해 학문적 성장과 리더십을 키워 나갔다. 결국 성리학의 사상과 이념으로 무장한 영조를 그 어떤 신하도 논리적으로 당해내지 못하게 되었다.

영조의 리더십 덕목 중 하나가 소통을 통한 공감 정치이다. 리더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 달성의 방법을 제시하는 역할이 아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진실한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역할이다. 이에 리더에게 필요한 요소는 조직을 한 방향으로 모으는 공감대 형성이다. 지시하기 전에 회의를 통해 부서의 뜻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정책을 뜻한다. 물론 이 방법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당연히 리더의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찬성과 반대, 다른 의견과 생각들이 부딪치면서 모난 것들이 점점 둥글게 순화되며 한 목소리로 결집될 때 그 능동적 추진력과 창의적인 발상의 힘은 강력해지는 것이다. 리더는 지시의 이론적 근거와 합리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지시의 명분에 부서원들의 공감과 복종의 자생적 힘이 붙는 것이다. 영조는 신하들의 유학적 기반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실력으로 압도한 것이다. 점차 신하들은 영조의 탁월한 리더십과 학문적 성취에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왕이라는 명분에, 실력이라는 힘을 더하게 된 것이다.

▶애민을 위한 고단한 탕평의 길

영조는 하나된 힘을 바탕으로 세금을 줄이고 불평등한 균역법을 개혁했다. 민생과 인권에도 관심을 가졌다. 가혹한 장형을 금지, 억울한 백성의 심정을 헤아렸다. 또 양반의 노비에 대한 사적 징계와 처벌을 금지했고, 벌을 받은 관리의 부인과 여식들의 신분을 관노로 전락시키는 일도 금지시켰다. 또 신문고를 다시 만들고 금주령으로 사치 풍조를 없앴다. 영조는 소식, 절약 등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궁중에서는 비단옷을 삼가할 정도로 사치와 부패를 경계했다.

영조는 하나씩 개혁의 성과를 냈다. 장마 때마다 하천의 물이 범람해 많은 피해를 입혔던 청계천 토목공사를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당시 업적이었다. 영조는 백성을 동원해 그들의 노동력으로 청계천을 준설하는 손쉬운 방법 대신 이를 경기부양책으로 활용했다. 영조는 백성을 동원하고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했다. 청계천의 준설, 장마 피해 예방, 그리고 백성에게 일거리를 마련함으로써 그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는 정책을 실시한 것이었다. 영조의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영조의 후계를 이은 정조 역시 이 방법을 썼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백성의 노동력에 정당한 임금을 지불했다. 즉 백성은 돈을 벌고, 국가는 그들의 노동력을 합법적으로 제공받은 것이다.

영조는 40세에 아들을 보았다. 이가 사도세자 즉 장헌세자이다. 영조는 세자를 아꼈다. 태어나자 바로 세자로 책봉하고 교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 부족과 출생 콤플렉스를 세자에게는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세자는 경종의 왕비 처소에서 양육되었다. 세자의 스승은 소론 출신들이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소론의 정신적 구심점인 경종비의 처소는 경종 독살설의 진원지였는데 그곳에서 영조의 후손이 교육을 받은 것이다.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인 서자라고 무시 당했고 왕이 되어서도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과 싸워야 했다. 또 자신의 편 노론마저 숙의였던 영조 어머니를 왕비로 추존하려는 뜻에 반대해 효도의 진심마저 접어야 했다. 이때 괴소문이 나돌았다. 바로 ‘왕통의 피가 바뀌었다’는 것. 즉 영조는 숙종의 핏줄이 아닌 노론 영수 김춘택이 숙의 최 씨와 정을 통하고 최 씨가 임신하자 궁궐로 보내 숙종의 눈에 들게 한 것이라는 소문. 이것이 ‘나주 괘서사건’이다. 터무니없는 소문이었지만 소론과 남인 강경파는 사실이라고 믿는 실정이었다. 이는 영조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나주 괘서사건으로 벌어진 을해옥사에서 영조는 136명을 처형했고, 700여 건에 대한 처벌을 내렸다. 이후 영조의 타협적인 면모는 사라지고, 강경한 어조와 고집스러운 행동이 나타났다.

영조는 양위와 대리청정을 통한 통치술을 자주 썼다. 즉 세자에게 권력을 내준다는 뜻을 비치면서 여론과 조정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를 힘의 균형 유지에 사용했다. 세자는 영조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학문적 성취에서 아버지 기대를 맞출 수 없었던 그는 소론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치적으로 아버지 영조와 반대편에 서게 된 것이다. 영조는 세자에게 ‘함정 질문’을 던졌다. 세자가 영조가 원하는 답을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압박하고, 솔직한 생각을 말하면 엄하게 다루는 교육 방법을 썼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가 이미 답을 정해놓고 회의라는 형식을 통해 구성원의 생각을 듣는 것은 불필요하고 부작용을 낳는 방식이다. 리더는 독단적인 생각과 결단으로 조직을 이끌기보다 합의를 통해 생성된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영조가 여러 가지 통치술로 여론 동향을 파악했던 것처럼. 하지만 영조와 세자의 소통은 부재했다. 세자에게 항상 탕평을 잘 계승하라 당부했지만 세자의 불만은 커져갔다. 1762년 세자는 소론계를 중용했고 결국 아버지 영조와의 극단적 갈등 끝에 뒤주에 갇혀 죽었다. 이후 영조는 세손 이산(훗날 정조)에 대해서는 훈육 방법을 달리했다. 영조는 세손에 대해서는 칭찬의 교육을 통해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켜냈다. 비정한 영조이지만 영조는 정조시대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기틀을 마련한 명군이다. 그는 많은 개혁으로 백성의 삶을 조금은 윤택하고, 조금은 편안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본래 ‘탕평蕩平은 치우치거나 무리지음이 없다’라는 뜻으로, 『서경』의 홍범 편에 나오는 개념이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영수를 불러 화목을 권하고 호응치 않으면 축출했다. 노론과 소론을 섞어서 임명하는 인사 정책을 실시했고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되자 재능 있는 자를 등용했다. 영조는 당파가 화합하도록 자주 술자리를 마련했다. 어느날 영조는 술상에 특별한 안주를 내놓을 것을 명했다. 녹두묵, 고기볶음, 미나리, 김 등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다른 빛깔의 재료들이 어우러진 음식을 통해, 화합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 한 것이다. 이 음식이 바로 지금도 우리들이 먹고 있는 탕평채이다. 그만큼 영조가 탕평에 쏟은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 조정 인사 실무권을 가진 실세 자리인 이조정랑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대한 인사권을 박탈했고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웠으며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당파를 고르게 등용했다.

영조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태생부터 그랬고 어쩔 수 없이 당쟁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다. 또 평생을 ‘형을 독살한 동생’으로 ‘왕통인 아닌 거짓 피줄’이라는 괴소문, 그리고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영조는 틀림없이 명석하고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한 리더였다. 그의 재위 52년 동안 이룩해 놓은 수많은 업적과 통치의 모범적 사례는 훗날 정조시절 활짝 꽃을 피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13호 (22.01.1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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