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없는 대선[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2. 1. 1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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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수많은 자살이 쌓인 위에 치러지고 있는 대선이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각종 부패, 비리, 횡령, 성범죄와 연루되어 수사를 앞두고 목숨을 끊은 정치인과 고위공직자의 연이은 자살은 단지 벼랑 끝에 몰린 일부의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 십수 년 동안 뚜렷하게 이어져온 사회적 실체다. <숭배 애도 적대>에서 천정환이 지적했듯 한국 사회에서 ‘세속의 승리자’인 고위층 중장년 남성의 잇따른 자살은 2000년대 이후 가시화된 흐름으로,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와 조직문화를 드러내는 정치적 역린이다. 지금 대선은 오랜 진영·적대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이 정치화된 죽음들 위에서 경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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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화되(지 않)고 있는 죽음은 고위층 중장년 남성들의 자살만이 아니다. 실로 배제되어 있고 어떤 유력 후보의 입에서도 들을 수 없는 죽음은 ‘세속의 승리자’도 지배계급도 아닌 이들의 자살이다. 코로나가 시작된 재작년 기준, 자살률은 전년 대비 4.4% 감소했지만 10대(9.4%)와 20대(12.8%) 등 청년층의 자살률은 크게 늘었다. 20대 중에서도 여성 자살률은 전년에 비해 25.5% 늘었으며, 작년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 사망자 수는 전년보다 43% 증가했다. 이들은 전체 자살 시도자의 19.9%로 전 세대와 성별을 통틀어 가장 높다. 그러나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 성범죄, 우울증으로 인한 경제적·심리적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의 죽음은 ‘조용한 학살’이라는 표현과 함께 작년을 휩쓴 주요한 사회 담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 [플랫]‘코로나19는 공평하지 않다’ 2020년 상반기 여성 자살 사망자 1924명

“출생률로 평가받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경선 후보도 있었고 “저출산은 페미니즘 때문”이라는 망언을 뱉은 후보도 있지만,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는 복지 공약 중 출생률이 아닌 자살률에 관해서는 유독 조용하다. 인구 정책으로서 출생률과 자살률의 중요한 차이점은 지원의 범위와 대상이다. 출생률 정책은 육아휴직, 돌봄노동, 청소년·미혼·한부모 가정, 난임 치료에 대한 인프라 확충과 지원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가임기 여성이라는 특정한 연령·성별의 신체적·경제적 조건이라는 요소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그러나 자살률 정책은 모든 연령·성별·지역·계급별로 무수한 원인을 고려하기 때문에 출생률과 달리 특정 연령·성별에게 책임을 귀속하고 의무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곧 자살자가 속한 집단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치적 관심과 지원이 분배된다는 뜻도 된다. 유력 후보들이 표심 확보 경쟁을 하며 눈치 보는 ‘청년세대’에서 정확히 여성을 도려내고 있는 이번 대선의 배타성은 자살 관련 정책이 증발해버린 정황과 무관할 리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죽고 있는지를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결정했는지, 특정 집단에서 비슷한 자살 사건이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정치가 어떤 죽음을 애도하거나 애도하지 않는지 묻지 않고 우리가 감히 삶의 질을 논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겪는 상실 중 인정되지 않는 슬픔의 영역이 있다. 이를 권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슬픔의 ‘대화적 층위’를 인정하는 것이다.”(케네스 도카, <박탈당한 슬픔>)

그러나 지금 정치가 도무지 대화할 생각이 없는 이 뚜렷한 죽음들 앞에서 우리에게 애도할 권리조차 없어 보인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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