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1인치의 장벽’ 무너뜨린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태훈 문화부 차장 2022. 1.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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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봉준호 “자막의 장벽 넘으면 더 좋은 영화 있다” 말해 이젠 “한국어로 즐겨야” 늘어
언어 문제 아니라 콘텐츠가 중요

“에이~ 우리나라에선 안 돼요.”

넷플릭스가 한국 서비스를 처음 시작하던 2016년 무렵, IPTV 관계자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으냐’ 물으면 늘 비슷한 대답을 들었다. ‘한국인은 콘텐츠에 비용 지불하는 걸 꺼리고, 콘텐츠도 많이 펼쳐 놓고 고르는 백화점식을 좋아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국내 IPTV 업체들은 너나없이 10만종 넘는 콘텐츠를 갖고 있었고, 넷플릭스 보유 콘텐츠는 1만종에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무료 기간인 한 달만 보고 구독을 끊는 비율이 세계에서 한국이 제일 높아, 넷플릭스 본사가 자존심 상해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오리지널 콘텐츠로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내놓은 2017년에도 국내 넷플릭스 가입자 수는 7만~8만명 정도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불과 5년여 만에 상황은 역전됐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가입자 수는 2020년에 이미 1135만명을 돌파하며 유료 TV 가입자 수를 앞질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과 ‘집콕’이 일상화되며 넷플릭스 등 OTT 플랫폼들은 대운을 탔다. 한국어 드라마와 영화도 2019년 ‘킹덤’으로 시작해 ‘스위트홈’ ‘승리호’ ‘오징어게임’ ‘지옥’ 등이 잇따라 세계와 접촉 면을 넓히며 인지도를 쌓아갔다. 작년 말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는 외신들의 혹평 속에서도 글로벌 드라마 순위 3위(플릭스패트롤 기준)까지 올랐다. ‘한국에서 만든 영상 콘텐츠는 볼만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청신호다.

연이은 세계 흥행으로 축적된 콘텐츠의 힘은 많은 걸 바꾸고 있다. 우선 한국어 자막. 2020년 미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은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고 했었다. ‘오징어 게임’은 그 ‘1인치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공개 첫 4주(28일) 만에 세계는 이 작품을 총 16억5045만시간 동안 시청했다. 햇수로 18만8000년, 영화와 TV 부문 통틀어 넷플릭스 사상 최다 시청 시간이다. 해외 네티즌들 사이에선 ‘한국 콘텐츠를 제대로 보려면 더빙이 아니라 자막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 비서관 출신 팟캐스트 운영자인 존 로베트, ‘토르: 라그나로크’의 감독 겸 배우 타이카 와이티티 등이 앞장서서 “더빙 말고 자막”을 주장했다.

‘자막 장벽’에 구멍이 뚫리면서, 한국어 콘텐츠를 대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지난해 말 ‘라라랜드’를 보유한 미국 엔데버 스튜디오를 인수하고 종합 미디어그룹 ‘바이아컴 CBS’와 파트너십을 맺었던 CJ ENM 관계자는 “’설국열차’를 영어로 찍었던 것처럼, 콘텐츠 해외 진출을 위해선 영어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바뀌어가고 있다”고 했다. 해외 미디어 기업의 경우 주주들이 먼저 나서서 한국 콘텐츠사와 제휴할 것을 요청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더 이상 꼭 영어로 된 콘텐츠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한국 제작사와 파트너가 되고 한국어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이 경쟁력이나 성장 동력 측면에서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에도 호재가 된다는 것이다.

오영수 배우는 골든 글로브 수상 소감으로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 속의 세계”라고 했었다. 우리 콘텐츠 기업들은 글로벌 플랫폼에 올라타거나 적극적 업무 제휴 등을 통해 세계를 우리 콘텐츠 속으로 끌어들이려 애쓰고 있다. 구멍 뚫리고 무너져가는 ‘1인치의 장벽’을 넘어, 한국 콘텐츠 산업은 전진하고 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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