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포도주를 위한 변명
[경향신문]
프랑스에서 오래 공부하고 돌아온 친구는 와인을 늘 ‘포도주’라고 불렀다. 그 말이 우스워 들을 때마다 타박을 했지만, 친구는 프랑스에서 부르던 대로 ‘뱅’이라 말하기도 그렇고 영어 이름을 쓰기도 싫었을 테니 ‘포도주’를 택했을 것이다. 하긴 포도로 만든 술을 포도주라고 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그러나 친구가 “한국 돌아와서 사람들이 너무 비싼 포도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한 것을 봐서는 뭔가 반감이 들었던 게 틀림없다. 좋은 레스토랑에 선남선녀들이 둘러앉아 저마다 와인 잔의 다리를 잡고 휘휘 돌리며 감탄사를 주고받는 그런 괴상한 풍경을 몇 번은 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와인은 비싸고 어렵고 이른바 ‘good taste’, 고상한 취향을 과시하는 상징 같아서 와인을 즐길 때마다 어떤 죄책감이 들곤 한다. 서민의 술 소주, 맥주와 달리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데다 중산층 유한계급의 속물성을 숨기고 있는 듯해서다. 하지만 그런 느낌도 예전의 일, 와인은 이제 주류수입 1위의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고, 해마다 10~15%씩 꾸준히 수입량이 증가하더니 작년에는 무려 80%가 증가했을 만큼 대중적인 술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 와인을 접한 사람으로서 요즘의 와인 문화에는 불만이 많다. 온통 가성비만을 외치며 싸고 좋은 와인을 찾거나, 천편일률적인 맛을 가진 와인들이 매대를 점령해서 적당한 와인 한 병 고르기가 꽤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싸면서 좋은’ 와인 그런 건 없다. 가격보다는 당신이 얼마나 즐겁게 마시는가가 문제일 뿐. 그 지역만의 색다른 와인, 그런 것도 이제는 점차 사라져 간다. 와인에 점수가 매겨지고 소비자가 그런 점수와 가격으로 와인을 평가하면서, 세계 와인업계의 큰손들이 추천하는 비슷비슷한 와인들만 남았을 뿐.
노을 지는 저녁 들녘에서 농부가 땀을 식히며 따라놓은 검붉은 포도주 한 잔. 성무 일과를 마친 수도사가 어둔 방 안에서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 앞에 드리는 기도. 깔깔 웃는 친구들의 붉어진 얼굴에 비치는 포도주의 투명한 빛깔. 그런 와인들은 어떤 값비싼 와인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순간의 경험을 선물한다. 와인에는 보르도 5대 샤토, 나파 밸리의 특급 와인만을 좇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호주의 어느 와인 생산자는 천진난만한 말로 와인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와인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답니다. 먼저 기름진 땅을 찾으세요. 여기에다 훌륭한 품종의 포도나무 묘목을 심으세요. 자연이 물과 햇빛을 선물하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요. 이 열매를 따서 으깨고 발효시키고 숙성시킨 다음, 즐겁게 마시면 됩니다.”
여기에 빠진 것은 ‘우리들의 이야기’뿐이다. “와인은 소비재 상품과 다르지 않으며, 전문가들이 인지할 수 있고 일반화시킬 수 있는 질의 기준이 있다”는 말로 세계 와인을 평준화시킨 뉴욕의 평론가 로버트 파커를 반박하며 영국의 휴 존슨은 이렇게 말한다. “와인을 줄 세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로 인해 좁디좁은 닭장에서 대량 사육되는 닭들이 생겨났고 대량생산 와인도 생겨났다. 그러나 여행을 즐기고 취향을 소중히 하며 그 즐거움을 친구와 나눌 줄 아는 이들에게 ‘선택’은 여전히 중요하다. 와인에 플롯이 있어야 한다면 오로지 다양성이 필요할 뿐이다.” 여기서 ‘플롯’은 포도밭의 땅뙈기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을 몰아가는 세계화와 산업화의 힘은 와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한결 풍성해진 와인 매대에서 그 과실을 누리기도 하지만, 모두가 비슷비슷해진 와인 맛에서 그늘을 체감한다.
시인 폴 베를렌은 말했다. “우리 앞의 와인들은 저마다의 풍경을 가지고 있다.” 와인에서도 우리는 이 평평해진 세상에 맞서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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