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의 한뼘 양생] 양생이 필요해
[경향신문]
양생을 인문학공동체의 새로운 비전으로 삼자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스피노자를 1년 동안 강도 높게 읽어보자거나 사서를 원문으로 강독해보자고 했을 때의 호응과는 사뭇 달랐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양생이라는 단어가 낯설다고 했다. 양생이라 하면 시멘트 양생이 먼저 떠오른다나? 믿을 수가 없었다. 주변 청년에게 물어봤다. 양생이라는 단어 아니? 뭐가 떠올라? 돌아오는 대답은, “후학 양생요?”였다. 맙소사! 양생이 낯선 단어가 맞는구나. 조용히 정정해줬다. “음, 후학은 양생(養生)하는 게 아니고 양성(養成)하는 거야.”
나아가 양생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도 문제였다. 그것은 넘쳐나는 건강정보, 운동처방들과 진짜 다른 것일까? 그것은 #습관의힘 #행동변화플랫폼 #데일리챌린지 #미라클루틴 #페이백 같은 해시태그와 확실히 구별되는 것일까? 작년에 함께 공부했던 후배는 양생이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일 년 내내 쏟아냈다. 작지만 밀도 있는 인문학공동체를 지향하는 곳에서 갑자기 웬 양생? 혹시 퇴행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7년 전 한순간의 결정이 내 인생을 꼬이게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양생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혼자 살던 엄마가 한밤중에 화장실에서 낙상하셨는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병원에서는 외상도 문제지만 넘어진 이유가 훨씬 중요하다면서 미끄러진 건지, 잠시 정신을 잃은 건지 물었는데 엄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몇 달 내내 엄마는 절망, 분노, 자기연민, 우울을 오락가락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함께 괴롭혔다. 퇴원 후 다시 혼자 지내시게 하는 건 위험했다. 결국 엄마와 살림을 합쳤다.
당시 난 중년의 딸과 노년의 엄마가 서로 의지하며 함께 늙어가는 이름다운 동거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웬걸,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늙은 엄마 욕을 하고 있었다.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에게 짜증이 났고, 그런 엄마가 뿜어내는 부정적 기운에 질식할 것 같았고, 엄마의 삼시세끼를 챙기느라 거의 앞치마와 합체가 될 지경이었고, 독박부양이 길어지면서 나를 돕지 않는 동생들에 대한 원망도 쌓여만 갔다. 한마디로 인생 바닥을 치고 있었다. 공부, 헛했구나, 라는 슬픈 깨달음!
태어난 이상 누구나 병들고 늙고 죽는다. 그런데 엄마는, 함께 살면서 보니까, 그것들에 대한 준비가, 생로병사를 나름대로 겪어낼 자기 언어가 전혀 없었다. 돈 벌고 자식 키우느라 바빠서였을 게다. 그러나 한편,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건강이 근대사회의 페티시(물신)가 되어버린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삶의 지평에서 죽음을 허겁지겁 감추고, 몸의 리듬에서 질병을 완벽히 추방하여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상태”(세계보건기구)라는 ‘정상성’을 삶의 목표로 제시하는 생명 권력의 시대에 건강하지 않은 노인이 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수치가 된다.
그렇다면 “엄마처럼 늙지 않을래!”라는 바람만으로 다른 노년을 맞을 순 없을 것이다. 수십 년 후 엄마처럼 잘 걷지도 못하고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는 상태가 되었을 때도 명랑한 할머니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질병과 나이듦에 대한 사색, 그리고 일상의 재구성 없이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장자>가 원 출전인 양생이라는 오래된 단어를, 건강하라는 사회적 명령, 관리하라는 자본의 유혹에 맞서 스스로 삶을 돌보고 가꾸는 기예로 다시 번역해 우리 삶의 전면에 배치하고 싶다.
몇 년 사이에 공동체 풍경이 좀 바뀌었다. 우리도 늙고 있었고 더 늙은 부모의 부양도 현안이 되어 있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결국 요양병원에 보내게 된 친구, 파킨슨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친구, 유방암에 걸린 친구, 만성신부전증이라는 난치병에 걸린 친구….
이제 공동체의 식탁에서는 하이데거나 노자, 양자역학과 페미니즘 이야기 못지않게 요양병원에 대한 정보, 알츠하이머병과 수두증 치매의 차이에 대한 설명, 신장병에 좋은 음식과 아닌 음식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늘어났다. 동시에 만 보 걷기 산책팀, 플랭크 도전팀 등 #데일리루틴을 수행하는 동아리들도 늘어났다. 단, 우리는 모두 관리의 여왕이 아니라 양생의 달인을 꿈꾼다. 이 귀한 지면을 빌려 앞으로 일상의 지혜와 수련, 그 양생 이야기를 나눠볼까 한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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