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층 원각사탑이 왜 120년이나 10층으로 불리나"
[경향신문]
1903년 일본 학자 세키노, 13층 명시한 기록들 무시하고 ‘10층설’ 주장
견해 바꿔 다층설 제기…1962년 국보 지정 과정에서 ‘다층→십층’ 수정돼
원각사탑의 공식 명칭은 ‘국보 원각사지십층석탑’이다. 불교사 연구자 남동신(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은 ‘10층’이 들어간 명칭이 일본 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10층설 등 “전제의 오류 위에 구축”된 것이라고 본다. 남 교수는 10층설을 폐기하고, 대원각사비(이하 원각사비) 기록을 근거로 13층설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하는 학술 간행물 ‘미술잡지’ 100호에 기고한 논문 ‘원각사 13층탑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에서 “원각사탑이 13층탑으로 건립됐다는 근거가 명백한데도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도록 13층설은 단 한 번도 공인받지 못했으며, 학계에서 층수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도 않았다”면서 “근대 건축학자(세키노)가 아니라 창건주(創建主) 관점에 서서 원각사탑의 층수를 바로잡으려 한다”고 했다. 남 교수 논문의 요지를 정리해본다.
■10층설의 기원
세키노는 근대건축학의 이름으로 원각사탑을 최초로 학술 조사했다. 1902년 동경제대 교수로 재직 중 한국을 찾아 조사했고, 이듬해 9월 원각사탑에 관한 짧은 논고를 발표했다. 그는 원 순제가 고려 충목왕 4년(1348) 경천사탑과 원각사탑을 제작해 고려로 보냈다는 <금릉집>의 설을 수용했다. 13층설을 속칭이라 치부하고 ‘3중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이 올려진 대리석탑’이라는 10층설을 제기했다. 이 설이 120년간 원각사탑 명칭을 좌우했다.
하지만 원각사비(1471년)에는 세조가 원각사탑을 ‘13층탑’으로 건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속동문선>에 실린 ‘원각사비’에서도 ‘탑 13층을 세웠다’라는 구절이 확인된다. <동국여지승람> 편찬자들은 원각사탑의 모범인 경천사탑이 13층탑임을 인식했다. 세키노보다 먼저 원각사탑을 조사한 교육관료 시데하라 다이라도 1900년 현지 조선인들의 얘기를 수용해 원각사탑이 13층탑이라고 했다.
통감부 관리로 조선에 부임한 아사미 린타로는 1909년 무렵 <속동문선>을 열람하다 대원각사비명 중 ‘십유삼층(十有三層)’이라는 구절을 발견했다.1908년 한국에 다시 온 세키노는 이듬해 아사미의 발견을 반영했다. 건립 주체와 시기, 탑 층수의 자기 기존 견해를 모두 수정했다. 탑골공원의 원각사탑은 세조가 경천사에 있던 고려 말 13층 석탑을 모방해 건립한 13층짜리 대리석탑임을 분명히 했다.
1913년 세키노는 다시 견해를 바꿔 탑신이 여러 층으로 된 탑이라는 의미에서 다층설을 제기했다. 1934년 5월 원각사탑은 보물 제4호로 지정되면서 ‘원각사지다층석탑’이란 이름이 붙었다. 13층설과 10층설을 절충해 ‘다층’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박정희 정권 최고회의가 통과시킨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해 설치한 문화재위원회는 1962년 7월12일 회의에서 ‘원각사지다층석탑’을 국보 4호로 지정했다. 11월23일 회의에서 명칭을 ‘원각사지십층석탑’으로 수정 의결했다.
남 교수는 현재 10층설이 고고학자 김원용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한다.
■한성의 흉물에서 볼거리로
조선 왕조는 주자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채택했다. 건국 초부터 숭유억불책을 펼치며, 한양 사대문 안 사찰 건립을 원칙적으로 불허했다. 세조는 조선 최후의 호불(好佛) 군주다. 즉위 10년(1464) 도성 한복판에 원각사를 창건했다. 1467년 백색 대리석으로 12m 높이 불탑을 세웠다. 유교 지배층은 이를 신왕조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명백한 역행으로 간주했다. 유학자들은 원각사탑이 한성의 경관을 해치는 흉물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건축물이라며 철거하려 했다. 세조 사후 원각사의 비운은 예견된 것이었다. 연산군은 원각사에서 승려를 축출하고 이곳을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장악원으로 삼도록 했다. 세월이 흐르며 목조 건축물은 붕괴되거나 철거됐다. 19세기 전반 관료들도 원각사탑이 유교적 이념이 구현되어야 할 한성의 경관을 해치는 ‘비미(非美)’라고 인식했다. 문신 박종희(1775~1848)는 이단에 대한 믿음을 원천봉쇄하려면 원각사탑을 철거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은 1880년대 문호 개방과 함께 들어온 서양인들에 의해 크게 바뀐다. 이들은 백색 석탑이 홀로 솟은 기이한 경관에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한성의 유일한 볼거리로 유명해졌다. 1883~1884년 서울에 체류하며 여행기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남긴 미국 외교관이자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민가 지붕에 올라 근경의 원각사탑을 찍었다. 1894~1897년 네 차례 조선을 방문한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원각사탑이 원래 13층이었는데, 상층부 3개 층이 300년 전 일본 침략(임진왜란으로 추정)으로 석탑 옆에 내려졌다는 구전을 채록했다.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는 경이로운 13층탑이 시내 중심가 종로 근처의 나병 환자들 오두막촌 한복판에 오랜 세월 파묻혀 있다가 발굴됐다고 기록했다.
언젠가 원각사탑 상층부 3개 층이 지상으로 끌어내려졌다. 몇 가지 설이 전해진다. 탑 건립을 감독하던 안평대군이 실권하며 올리지 못했다는 설, 연산군 10년(1504) 도성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3개 층을 내리게 했다는 설, 중종 때 원각사를 철거하며 탑을 양주 회암사로 이전하려다 중지했다는 설 등이다. 서양인들 기록엔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반출을 위해 끌어내렸다는 설도 나온다. 세키노도 1904년 보고서에서 “구비(口碑)에 의하면 임진역(壬辰役) 때 가토가 일본으로 보내려고 내렸지만 중량이 과대해 버리고 돌아갔다고 함”이라고 썼다. 원각사탑 상층부 3개 층은 1946년 2월 미군 공병부대 도움으로 원위치에 다시 올라갔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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