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단축, 사회보장 방안과 함께

한겨레 2022. 1. 12. 18: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시간' 단축이 전부 아냐
20대 대선이 다가오면서 노동시간에 대한 논의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2019년 12월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노동시간 제한 제도 개악 규탄 민주노총 기자회견’ 모습. 김혜윤 기자

[왜냐면] 한상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대변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20년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연 노동시간은 1908시간으로 일본의 1598시간, 오이시디 평균 1687시간을 훨씬 웃돈다.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긴 나라는 멕시코(2124시간)가 유일하다. 한편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시간당 117달러로 일본(104달러), 오이시디 평균(107달러)을 크게 앞지른다.

노동시간 단축은 현재 겪고 있으며 또 다가올 미래의 충격을 해결하고 우리 사회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단순히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기후위기 대응, 불안정 노동 규제, 기형적인 임금체계 해소, 허술한 사회보장제도 강화, 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비정규직과 작은 사업장 노동자의 기본권 신장 등과 함께 추진될 때 사회 변화와 발전의 토대로 작용할 수 있다.

기후위기와 이에 대응하는 산업 구조·질서의 재편은 큰 화두이며 시급한 당면 과제다. 이에 대한 적절하고 적극적인 대응이 시민의 삶을 좌우할 것이라는 점에 이견은 없다. 특히 이 과정에서 벌어질 실업과 고용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안이라고는 전직·전환 교육 등 실효성이 의심되는 기존 구조조정 대책뿐이다. 관성적인 대책을 넘어 근본적인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는 일자리 문제에 대한 근본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지난해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주 52시간제 적용을 두고 사회적 논쟁이 활발할 때 재계와 사용자단체는 연장근로가 제한되면 임금이 줄어들어 현장의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는 논리를 들고나오며 오히려 노동시간 연장을 주장했다. 또한 최근 한 대선 후보가 여기에 편승하며 다시 논쟁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갈아 넣는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원인에 대해선 말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 장시간 노동은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한 낮은 임금과 모순적인 임금구조에서 기인한다.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최근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오이시디 회원국 가운데 여전히 높은 편이며, 월 임금 기준으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또한 기본급의 비중이 낮고 연장근로·특근 등의 수당이 과도하게 높은 임금구조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 감소로 직결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정 임금 보장과 비정상적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것과 함께 가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일부 시장 임금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보완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한다. 시장 임금만으로는 천정부지로 뛰는 부동산 가격과 과도한 의료비와 교육비, 수도광열비, 교통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택과 교육과 의료, 교통, 보육을 국가가 책임지거나 많은 부분 감당함으로써 여기에 들어가는 개인의 비용을 줄여야 한다. 이래야만 혹여 노동시간 단축으로 수령 임금이 줄어들어도 복지의 확대로 이를 상쇄해 삶의 전반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이처럼 사회보장시스템의 강화와 함께 논의하고 실행해야 한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시간 양극화, 즉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는 노동자’에게 적정 노동시간을 보장하는 대책과도 함께 가야 한다. 급증하고 있는 (초)단시간 노동 규제, 부족한 노동시간으로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불안정 노동자에게 예측 가능한 최소 노동시간 보장 등 노동시간 자율성을 보장하는 조치가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강구되어야 한다.

20대 대선에 접어들며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퇴행적 선동을 포함해 여러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시간 단축이 제대로 실현되고 의미를 가지려면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 임금 보장, 불안정 노동자에게 최소 노동시간 보장, 사회보장제도 강화, 비정규직과 작은 사업장 노동자 권리 보장 등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시간만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경우, 현재 우리 사회에 구조화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