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옭아매는 '사업장 변경 제한'..사용자 잘못해도 '합의 유도' 부지기수
[경향신문]
지난달 강원도의 한 공장에서는 관리자가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던 기숙사에 한밤중에 쳐들어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A씨와 동료들을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피해자들은 ‘폭행을 당해 사업장 변경을 신청한다’는 공문과 함께 피해 사진을 고용센터에 보냈다. 하지만 고용센터가 수사기관에서 제출받은 서류 등을 요구하는 사이 관리자는 “‘합의에 의한 계약 해지’를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당장 생계가 급했던 A씨는 어쩔 수 없이 사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작년 한 해 국내에 체류 중인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 신청 사례가 3만건을 넘긴 가운데 10건 중 8건은 A씨 사례처럼 사업주와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명목상 ‘사업주와 합의’가 실제 이주노동자들의 의사와 동떨어진 경우가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어떤 형태로든 이들의 사업장 이동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2일 경향신문이 고용노동부에서 받은 ‘이주노동자 사업장 변경 사유별 신청 및 승인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사업장 변경을 신청한 사례는 총 3만2140건으로 집계됐다. 근로계약 해지 또는 만료로 인한 신청이 전체의 85.6%인 2만7512건에 이르렀다. 사용자와 합의를 전제로 하는 계약 해지나 만료가 그만큼이라는 의미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14.4%는 사용자 책임이 있는 사유로 추정된다. 세부적으로는 휴·폐업 4179건(13.0%), 고용허가 취소 61건(0.19%), 고용 제한 53건(0.16%), 상해 등 기타 사유 31건(0.10%), 기숙사 미개선 12건(0.04%), 근로조건 위반 또는 부당한 처우 292건(0.01%) 등이었다.
정부는 2004년 도입한 고용허가제에 따라 이주노동자들이 자기 책임이 아닌 사유로 기존 사업장에서 일할 수 없는 경우에만 사업장 변경을 인정한다. 또 3년 안에 3회를 초과해 사업장을 변경할 수 없는데, 사측의 부당행위에도 A씨처럼 중도에 합의할 경우 변경 가능 횟수가 1회 줄어든다. 심지어 임금 체불이 발생해도 월급의 30% 이상을 2개월이 지나도록 지급하지 않는 등 특정 요건에 맞아야만 사업장을 바꿀 수 있다.
이주단체들은 고용센터가 과다한 입증 자료를 요구하는 탓에 신청 자체를 중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센터의 사건 처리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노동자들이 조사가 길어지면 ‘울며 겨자먹기’로 사용자와 합의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지호 의정부외국인력지원센터 상담팀장은 “센터는 경찰이나 노동청에서 사용자의 불법행위를 송치했는지 여부를 확인한 뒤 사업장 변경을 승인하는 경향이 있어 임시 사업장 변경 등의 조치를 적극 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직장을 옮기기 어려운 이 같은 ‘현대판 노예제’를 없애야 한다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지난 연말 고용허가제에 대해 재판관 7 대 2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불법체류자가 급격히 늘어나 외국인 근로자의 효율적 관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헌재 소수의견에 언급된 것처럼 불합리한 행정이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탈을 부추겨 미등록 체류자를 양산한다”면서 “사업장 변경 사유와 횟수 제한 폐지가 최우선이고, 폐지하지 않는다면 행정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전문가를 투입해 노동자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섹알마문 이주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은 위험하고 기숙사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한국인 노동자들이 꺼린다”며 “이주노동자들에게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헤택은 결국 한국 사회에 돌아온다. 일하는 환경을 개선해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하얀·박채영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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