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의 짜증엔 이유가 있었다 [오늘을 생각한다]

2022. 1. 1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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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길바닥이 얼어붙은 겨울날, 일흔을 앞둔 엄마는 산책 도중 넘어졌다. 수술을 잘 마쳤지만 한달 넘게 깁스 신세다. 퇴원한 엄마를 찾아 산자락에 있는 부모님댁으로 향했다. 엄마는 산지직송 방어를 주문했고, ‘방어 대파티’를 열기로 했다. 한데 방어가 오지 않았다. 5시 전엔 도착할 거라고 장담했는데 1시간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엄마는 더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늘 저녁 메뉴가 아닌가.

“기사님, 포방터길에서 방어 택배 받아야 하는 사람인데요. 어디쯤이신가요? 직접 가지러 갈게요.” 놀랍게도 택배기사는 아직 안 갔냐고 되물었다. 물량이 많아 다른 업체 기사한테 넘겼다는 거다. 그리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당황스럽지만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뉴스에서 본 택배기사들의 과로사 원인은 하루 14시간 300건이 넘는 택배 물건을 배달해야 하는 현실에 있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다시 전화했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물건을 맡긴 다른 업체에 확인해주실 수 있….” 말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그는 짜증을 냈다. “아니 XX 바빠 죽겠는데 왜 자꾸 전화하고 그래요? 확인해보면 될 거 아녜요.” 뚝. 억울했지만 기다렸다. 돌이켜 보니 짜증 섞인 말투에는 울분 섞인 하소연도 배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문제다. 기다려도 되고, 방어 따위 오늘 안 먹어도 그만인데, 자식놈 때문에 주문한 방어를 애타게 기다리는 엄마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바쁜 그가 말허리를 자르지 못하도록 1.5배속으로 말했다. “잠시만요. 기사님, 바쁘시죠? 그 방어 넘긴 다른 기사님 연락처만 알려주세요. 제가 직접 연락해서 찾아오려고요.”

다행히 다른 기사의 연락처를 받았다. 배터리 수명이 다 돼버려 포방터 꼭대기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고 했다. 가파른 골목을 뛰어올라 택배차량을 찾았다. 탑차 겉에는 “사회적 합의 이행하라!” 구호를 적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택배기사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죄송하다고 했다. “아녜요, 그럴 수 있죠.” 방어를 받고 돌아서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투쟁 승리하시길 바랄게요!” 그가 휘둥그레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 택배노동자들은 엄혹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뭉쳤고, 분류작업 떠맡기기 중단과 주간 60시간 이내 근무 등 합의를 이뤘다. CJ대한통운이 택배요금 인상분 170원을 기사들에게 제대로 지급하지 않자 다시 싸움에 나섰다. 고객에게 “진짜 죽겠다고요!”라고 소리친 그의 짜증엔 이유가 있다. 덜 녹은 방어를 먹으며 생각했다. 재촉해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낼까? 머뭇거리다가 그러지 못했다. ‘미안해요, 기사님.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택배기사의 짜증은 과로에 지친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원인은 이윤밖에 모르는 물류 자본에 있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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