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촉즉발 우크라이나… “러시아 놈들 올테면 와라” “설마 전쟁날까”

키예프(우크라이나)/정철환 특파원 2022. 1. 12.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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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 우크라이나 - 정철환 특파원 르포]
우크라 ‘국민 저항법’ 발효… “러, 침공땐 큰 희생 각오해야”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으로 안보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지난 9일(현지 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對) 우크라이나 정책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우크라이나 국기와 ‘푸틴에게 싫다고 말해’라고 쓰인 대형 펼침막 주변에 시위대가 모여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 주변에 10만 병력을 배치한 상태다. 미국과 러시아는 이번 사태를 놓고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협상을 벌였지만 뚜렷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AFP 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에서 비행기로 3시간 15분 만에 도착한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는 10일(현지 시각) 간간이 휘날리는 눈발 속에 평온해 보였다. 키예프의 보리스필 국제공항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 120여 편의 국제선 항공이 중단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크리스마스(1월 7일) 축하 메시지가 곳곳에 걸린 시내에는 상점과 식당마다 시민들로 북적였다.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으로 안보 위기가 고조되면서 자국 운명을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외교 협상 중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수 키예프 시민은 불안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시내 중심가의 미하일리브스카 광장 근처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셰브첸코씨는 미·러 협상 소식을 전하는 TV 뉴스를 보다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내전이 발생한)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는 벌써 7년째 (러시아와) 전쟁 중이나 마찬가지”라고 탄식했다. 동부 돈바스 지역의 내전 상황이 사실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리 전쟁’이란 것이다. 그는 “러시아가 직접 침공해 온다 해도 우리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와 내 친구들은 예비군에도 자원했다”고 했다.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으로 안보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지난 9일(현지 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對)우크라이나 정책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우크라이나 국기와 ‘푸틴에 반대하라’라고 쓰인 대형 펼침막 주변에 시위대가 모여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 주변에 10만 병력을 배치한 상태다. 미국과 러시아는 이번 사태를 놓고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협상을 벌였지만 뚜렷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그의 말대로 우크라이나에는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에 이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는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지난 주말 미하일리브스카 광장에선 러시아의 지속적인 도발을 비판하는 시위도 열렸다. 1000여 명이 모여 러시아를 비판하는 초대형 플래카드를 광장에 펼쳤고, 수백명이 “푸틴에게 반대하라(Say no to Putin)”는 구호를 외쳤다.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도 적지 않다. 키예프에서 호텔 매니저로 일한다는 바셰카씨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만만하게 본다고는 생각하지만, 실제로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서방의 경제제재로 러시아가 큰 타격을 입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젊은층 의견이 대체로 비슷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공항에서 만난 고등학교 교사 루드밀라씨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감은 높지만,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엇갈린다”며 “뭐가 맞는 건지 상당히 혼란스럽다”고 했다.

1월 9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에서 열린 반러시아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EPA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을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10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벌인 양국 간 협상은 별 소득 없이 끝났다. “7시간이 넘는 회담 시간 내내 양국 입장이 평행선만 달리다 막을 내렸다”고 러시아 타스 통신은 전했다. 세르게이 럅코프 러시아 외무부 차관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가 등 러시아의 안보 보장 요구를 미국이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버텼다. 미국의 양보가 현 사태를 불러일으킨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의 러시아 병력 10만명을 철군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란 것이다. 하지만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안보 보장 요구안을 절대 받을 수 없으니 그것 빼고 다른 걸 논의하자”고 맞섰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에 침공 시 지상군을 지원할 수 있는 지상 공격기와 공격·수송용 헬리콥터를 추가 배치하기 시작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신문은 미국 관리를 인용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2월까지 늦출 것”이라는 추정도 내놨다. 땅이 적당히 얼어붙어 러시아군의 기갑 장비가 기동하기 좋은 상황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1월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미국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안보 협상에 나선 웬디 셔먼(왼쪽) 미국 국무부 부장관과 세르게이 햡코프 러시아 외무부 차관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AF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정부는 현재 이러한 국경 상황에 대해 외국 언론에 사실 확인을 해주지 있지 않은 상태다. 본지 문의에 우크라이나 정부 인사는 “현재 외국 언론 질의에 대한 답변은 제한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국방부와 외교부는 모두 문을 걸어잠그고 침묵에 빠졌다. 이날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키에프에서 옌스 플로트너 독일 총리 외교정책 보좌관과 에마뉘엘 본 프랑스 대통령 외교 보좌관과 만나 면담을 가졌다.

미국과 러시아가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만약 있을지 모르는 사태 악화에 대비하고 있다. 이 지역 최대 신문 중 하나인 ‘팍티이코멘타리’는 인터넷판을 통해 “이달 말 혹은 2월 초 러시아의 공격이 예상된다”는 우크라이나 군 관계자의 인터뷰를 실었다.

지난 8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열린 반러시아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얼굴 아래 ‘살인자’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지난 1일 ‘국민 저항법(national resistance act)’이라는 새 법령을 발효했다. 외침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예비군과 민병대를 조직해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게 한 내용이다. 사실상 러시아를 겨냥한 법이다. 또 서방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잇따라 도입하며 군 전력 강화에 힘쓰고 있다. 개당 8만달러에 이르는 미국산 대전차 미사일 ‘재블린’이 대표적이다. 러시아가 수천대의 전차로 구성된 기갑 병력을 앞세울 것으로 본 포석이다.

키예프에 주재 중인 한 서방 외교관은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군의 대비 태세가 상당히 강화된 상황”이라며 “러시아가 군사적 성공을 원한다면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7년간의 돈바스 내전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은 우크라이나군은 1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군 병사 한 명이 9일(현지시간)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과 대치하는 도네츠크 지역 전선의 참호에서 이동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또 다른 유럽 외교관은 “지금 정세는 우크라이나가 (몸값을 받기 위한) 러시아의 ‘인질’로 활용되는 상황”이라며 “서방과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 이상 인질을 죽이는 행위(침공)는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고 했다. 이 외교관에 따르면 2014년 크림 반도 사태 때는 키예프에서 생필품 사재기 현상도 일부 발생했으나, 아직은 그런 조짐이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이날 별 성과 없이 회담이 끝난 뒤 각각 기자회견을 열어 국제사회를 상대로 ‘여론전’을 펼쳤다.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초강력 수출 통제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러시아는 “추가적 군사·기술적 대응을 할 수 있다”며 서로 위협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럅코프 차관은 “상황을 절망적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했고, 셔먼 부장관도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을 제의했다”며 추가 협상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외교적 돌파구가 생긴 건 아니지만 최소한 러시아가 요구를 강화하거나, 회담장에서 나가버리지는 않았다”면서 “미국 입장에선 ‘느린 대화’가 ‘침공’보다는 낫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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