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여성가족부는 어쩌다 ‘대선 쇼’의 제물로 전락했나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2022. 1. 12.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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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 폐지’ 7자 공약
2030남성들 열광적 지지에 대선판 쓰나미로 덮쳐
독선·불통 상징 된 페미니즘
10대들 ‘페미’가 욕인 줄 알아
통렬한 반성 없이 정치 놀음만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17층 여성가족부의 모습. /뉴시스

집안싸움에 뿌리까지 흔들리던 국민의힘이 단 한 줄 공약으로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지난 7일 윤석열 후보가 페이스북에 올린 ‘여·성·가·족·부·폐·지’다. 삽시간에 온라인 포털을 장악한 ‘7자’ 공약엔 1만 건 넘는 댓글이 달렸다. ‘심는다’ 공약으로 천만 탈모인을 열광시킨 이재명 후보가 뻘쭘해질 만큼 지지 댓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필 이 후보가 페미니즘 성향 유튜브에 출연한 날이라 파괴력이 컸다. 심상정 후보가 ‘여·성·가·족·부·강·화’로 맞불을 놓고, 여성 단체들이 “혐오 정치의 팻말”이라며 일제히 비난했지만 가뭇없이 묻혔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여성 정책을 다루는 부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찬밥이자 동네북이었다. 미군정이 여성의 사회·경제 생활 개선과 복지 업무를 맡을 부녀국을 설립했으나 “예산 낭비”라며 폐지 요구가 들끓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여성부를 출범시켰지만 정부가 바뀔 때마다 개편과 개명, 폐지 논란을 거듭했다.

잠시 ‘전성기’가 있긴 했다.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와 보육 문제 해결을 국정 과제로 내세운 노무현 정부 때다. 보건복지부 소관이던 보육·가족 업무를 가져와 여성가족부로 확대 개편했다. 저출산 파도에 보육 업무가 급증하자 날밤 새우는 공무원도 늘어났다. 성매매 퇴치에 호주제 폐지까지 직원들 혹사하기로 악명 높았던 지은희 장관 별명이 ‘지칼’이었고, 장하진 장관은 과로로 쓰러졌다. 공무원은 노는 사람들이란 편견이 그때 깨졌다. 첫 여성 대통령이던 박근혜 정부 때도 여가부에 힘을 실었다. 대통령 신임 두터웠던 조윤선 장관은 ‘워라밸(일·가족 균형)’이란 말을 초등생부터 80대 노인까지 알게 한 주역이다. 여가부가 한 일이 뭐냐, 윽박지를 수 없는 이유다.

역설적이게도 여성가족부의 추락은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정부’에서 시작됐다. 대한민국 정계와 문화계를 휩쓴 미투, 그중에서도 박원순·오거돈 성폭력 사건을 뒷짐 지고 방관한 ‘원죄’만이 아니다.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 비리 엄호는 권력이 된 여성운동가들과 여가부가 한통속임을 입증했다. ‘대깨문’들 공격엔 속수무책 무너졌다. 정현백 장관이 여성을 비하한 탁현민은 “사퇴하는 게 맞는다”고 발언하자 장관 경질 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을 도배했고, 정 장관은 “업무에만 전념하겠다”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정점은 권인숙 의원이 찍었다. 386 운동권의 성폭력 실태를 폭로한 여성계 마지막 양심이었던 그는 자기 당 대선 후보 아들의 저질스러운 여성 혐오 발언이 “평범하다” 두둔해 충격을 던졌다. 그 역시 개각 때면 여가부 장관 하마평에 올랐던 인물이다.

여성보다 권력을 비호한 페미니스트 정권 덕에 여가부 폐지는 일부 마초의 ‘생떼’에서 대세로 가는 분위기다. 지난해 7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48.6%가 여가부 폐지에 찬성했고, 여성의 38.3%도 폐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페미 행보는 전략적 실수”라는 내부 비판에 직면한 이재명 후보도 어떤 형태로든 여가부 개편 카드를 집어 들 가능성이 크다.

정부 전체 예산의 0.2%(1조2300억)에 인력은 기상청 4분의 1에 불과한 초미니 부서의 존폐 여부가 대선의 뜨거운 관심사가 된 이유는 뭘까. OECD 부동의 1위인 성별 임금 격차와 독박 육아,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들이 폭행당하고 살해되는 나라에서 여성이 권력과 동일시돼 비난받는 이유는 뭘까. 우매한 남성들의 광기인가, 표를 위해서라면 대선이 예능 판이 되어도 좋다는 반지성의 시대여서일까.

‘조국 흑서’를 쓴 김경율 회계사는 페미니즘 얘기가 나오면 입을 닫는다고 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뭇매를 맞기 때문이란다.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저자로 주류 여성계를 비판해온 오세라비씨는 “절대 가치가 된 한국 페미니즘은 자기 비판과 토론이 없는 성역화된 지대”라고 일갈했다. 진영의 이익 단체로 변질한 여성계를 떠나는 인사도 속출하고 있다. 한 여성학자는 “주류 여성계는 설득과 소통 없이 남성을 배척하고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을 손절함으로써 스스로 고립돼버렸다. 변화한 환경, 시대의 요구를 읽지 못한 채 정치 놀음만 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10대 여자아이들은 ‘페미’가 욕인 줄 안다. 독선, 불통과 동의어가 돼가는 한국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조차 피로감을 주고 있다. 누구도 통렬히 반성하지 않는다. 탄광의 카나리아는 죽었다. ‘여성가족부 폐지’ 구호가 대선 판의 쓰나미로 덮친 건 예고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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