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나만의 성지, 숲속의 무덤
누구에게나 비밀 공간이 있다. 연인들에겐 둘만의 밀회 장소가 있고, 아이들에겐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놀이 공간이 있다. 옛날 집 안 다락방은 말 그대로 비밀 창고였다. 시집올 때 장만해왔던 금가락지와 비녀가 숨겨진 장소였고, 아이들이 엄마·아빠의 매서운 눈길을 피해 숨는 피난처였다.
나에게도 남모르는 비밀 공간이 하나 있다. 무덤이다. 경기도 산속에 사는 나는 가끔 출몰하는 야생동물과 싸워야 한다. 어느 날, 집 근처까지 내려온 멧돼지의 흔적을 추적하다 무덤과 맞닥뜨렸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숲속의 무덤이라니…. 그러나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순전히 연극 ‘염쟁이 유씨’의 대사 한 토막 덕분이었다. 늘 시신을 다뤄야 하는 유씨는 질문을 받는다. ‘시체가 안 무섭냐’고. 그가 답한다.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이 뭐가 무서워.”
그렇다. 산 사람이 나를 해코지하지 죽은 사람이 나를 해칠 일 없다. 그런데도 정작 겁내야 할 산 사람은 안 무서워한다. 겁낼 필요가 없는 시체 앞에서 떤다. 이미 흙 속에 묻힌 무덤 앞에서도 흠칫 놀란다.
나는 그곳을 나만의 성지로 만들기로 했다. 산책로를 내고, 긴 의자를 하나 갖다 뒀다. 그 의자에 앉아 무덤의 이야기를 듣는다. ‘Hodie Mich,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우리는 모두 ‘필멸자(必滅者)’라는 깨침이다. 나를 향한 인생의 나침반이다.
마음이 울적해질 때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 아내와 싸우고도 찾는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이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
사람들이 내게 묻곤 한다. ‘목사님도 화를 내세요?’ 몰라도 한참 모른다. 내 속에 얼마나 많은 화가 꿈틀거리는지. 그럴 때마다 찾는 성구가 있다. “일어나소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 도와주소서! 저들의 얼굴을 후려갈기소서. 이쪽저쪽 귀싸대기를 올리소서. 주먹으로 아구창을 날리소서.” 성경을 당시 언어로 쉽게 풀어 쓴 ‘더 메시지 바이블’ 시편 3장7절에 나오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드린 기도다.
나도 무덤가에서 그 기도를 드린다. 그때 무덤이 말을 걸어온다.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어느덧 화도 슬픔도 가라앉는다. ‘안녕…’ 인사를 하고 떠나는 나를 향해 무덤이 빙긋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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