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난 회장 아닌 의자 나르는 '체어맨'.. 술집만 있는 골목에 문화를 더하고 싶다"

양지호 기자 2022. 1. 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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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 연 이승한 전 홈플러스 회장
/양지호 기자

“골목 문화가 국가 경쟁력입니다.”

매출액 12조원, 임직원 3만7000명을 훌쩍 넘기는 회사 CEO·회장을 지낸 이승한(76) 전 홈플러스 회장은 2018년 나이 72세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문화가 숨 쉬는 아름다운 골목길과 도시를 만드는 일이 꿈이라며 서울 강남 선릉역 인근에 복합 문화 공간 ‘북쌔즈(Booksays)’를 만들어 경영하고 있다. 서점⋅카페⋅베이커리⋅공연장⋅강연장을 합쳤다. 지난 5일 만난 이 회장은 “이 주변에 직장인은 많지만 이렇다 할 문화 공간이 하나도 없다”며 “골목길은 도시의 문화적·경제적 무형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라고 했다.

그가 홈플러스 회장직에서 물러난 것이 2014년, 4년 뒤에 북쌔즈를 차리며 회장님은 골목 상권 ‘소상공인’이 됐다. 그 차이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의자에 앉아서 지시·기획하는 체어맨(Chairman·회장)에서 ‘의자를 들어 나르는 사람’이 됐다.” 북쌔즈에서 공연이나 강연을 할 때 일손이 부족하면 그도 의자를 나른다. 그는 “문화 공간 운영은 내가 하고 싶고 사회에 공헌하는 일인데 의자 좀 옮기면 어떠냐”라고 했다.

1층 오른쪽 벽과 2층 서가는 책으로, 1층 왼쪽 벽에는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이 공간은 이날 코로나와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온 강남 직장인들로 붐볐다. 코로나 유행으로 지난해부터 공연·강연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과거 금난새가 지휘한 실내악 공연, 영국 가수 폴 포츠의 무대, 김형석·최진석 교수의 강연 등이 열렸다. 젊은이들을 위해 대부분 강연은 무료로 진행했다.

그는 최근 50년 넘은 경영 경험을 담은 에세이집 ‘시선’(북쌔즈)을 냈다. 삼성맨으로 시작해 홈플러스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골목 소상공인이 된 이 회장은 “보는 곳에 따라 생각이 바뀐다”는 평소 경영 철학을 담았다. 경영자라면 ‘둘러 보고’ ‘달리 보고’ ‘멀리 보고’ ‘높이 보고’ ‘건너 보고’ ‘깊이 보는’ 여섯 가지 시선을 갖춰야 한다는 원칙을 담았다.

그는 “단순히 늙어서는(getting old) 안 되고, 늙으며 성장해야(growing old) 한다”고 생각하며 나이 일흔 넘어 새로운 도전을 했다고 한다. 다음 세대에 어떤 사회적 유산을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복합 문화 공간에 착안한 것이다. 그는 “직장인 대상 식당·주점만 있는 선릉역 뒷골목에 문화를 더하고 싶었다”며 “내 도전에 자극받아 전국적으로 이런 공간이 만들어지도록 영감을 주고 싶다”고 했다.

최근 경영에세이 '시선'을 펴낸 이승한 전 홈플러스 회장(오른쪽)과 아내 엄정희 교수.

‘시선’은 남편 이승한 회장이 쓴 글을 아내 엄정희 서울사이버대 교수가 편집한 부부 공동 작업이다. 엄 교수는 “노년은 인생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의 열쇠를 풀어내는 시기이자 자아통합의 시기인데 남편을 통해 매일매일 학습하며 봉사의 끈을 놓지 않는 노년기 예시를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남편 이 회장의 75세 생일에 맞춘 일종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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